-
-
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이 작품과 비교가 되는 작품이 있다. 쥐스킨트의 비둘기와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더 게임'이란 영화다.
더 게임에서 나를 파멸하기 위해 주변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알고보면 그건 자신을 놀려주기 위한 그야말로 게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둘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행복해 보지 못했던 노인이 자신의 공간을 침입한 비둘기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비둘기이기 때문에 무섭고, 비둘기여서 누군가에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간혹 유머스런 삽화들이 등장하지만 음률은 처음부터 침침하게 무거운 일관성을 띤다. 다소 과장스런 행동은 보이지만 인물의 성격과 행위는 거의 일치된다.
반면 '콧수염'은 모짤트의 경쾌한 소나타처럼 발랄하게 시작된다. 5년 동안 같이 살고 있는 '나'와 '아네스'는 그야말로 달콤한 인생을 살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도 없고, 불임의 고통을 겪고 있지도 않고, 여전히 뜨거운 사이이다.--게다가 그의 직업은 거의 자유스럽기까지 하다. 아내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도 그저 귀엽게 보일 뿐이다. 주말에는 부모님을 만나 식사를 하고,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서 보내기도 한다.
유토피아 소설인가? 그럼 이 이야기를 작가는 어떻게 빈 곳을 만들고, 채워나갈 것인가?
초반부에 등장하는 발랄한 음률은 태풍의 눈이었다.
현대인은 과거를 결코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것을 역설하듯이 '나'는 과거를 잃어버린다. 아니, 내가 알고 있는 과거와 사람들이 기억하는 과거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던 과거 때문에 현재가 침탈 당한다. 누구의 과거(역사)가 원형인가? 무엇이 진실인가? 작가는 모든 질문을 독자에게 유보한다. 어쩌면 작가 자신도 이들의 진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인물은 안정된 현재를 위해 미래를 꿈꾼다. 그가 그리는 미래는 어떤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카레르가 보는 현대인의 모습은 어느정도 정확해 보인다. 주인공이 현실로의 도피처로 택한 것은 '홍콩'이었다. (그는 홍콩갔다^^;)거기서 그는 페리 선을 타게 되면서 혼자서 모두를 상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페리 선에서의 무한한 반복을 꿈꾼다. 반복이란 일상을 말하며, 그는 일상을 지겨워하는 게 아니라 일상을 그리고 하고 있다. 쿤데라는 행복은 무한한 반복이라고 다소 역설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 일상은 결코 돌아오지 못할 어떤 꿈과도 같은 것이다.
쥐스킨트의 '비둘기'의 인물은 어딘가 보이지 않는 실로 작가가 인물을 조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콧수염의 '나'는 인물 스스로가 텍스트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로 이것은 대단한 경지라고 할 만한데, 나는 텍스트가 거의 끝날 때까지도 이 작가가 어떤 결말을 낼지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 작품의 결말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었는데, 실로 교묘한 재주로 날 감탄시킬 수 있으리라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믿음은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쥐스킨트의 비둘기가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콧수염'의 결말은 한마디로 말하면 잔혹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주는 효과는 그리스 문학의 잔혹과는 또 다른데, 작가가 의도한 것은 오랫 동안 독자의 기억에 남기기 위한 전략이라고 생각되지만, 어쨌거나 내게는 그 결말이 아쉬울 뿐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주관(독단)적인 견해일 뿐이지만, 소설의 세계에선 하나의 사념이나 사건을 끝까지 지탱하는 게 최고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그 미덕에는 정말 충실했다.
그리고
1985.4.22-5.27이라고 마침표를 찍은 것을 보니 재주는 대단하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