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따뜻한 봄날의 개나리 빛깔과도 같은 책표지가 내 눈에 쏙 들어왔던 이유는 산티아고를 상징하는 노란색 화살표 때문이었는지, 늘 동경하며 선망해왔던 산티아고란 글자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저자가 서영은이란 이유에서였는지 쉽게 분간하기가 어렵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풍겨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서영은 작가의 산티아고 순례기란 소제가 이 책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란 다짐을 하게 한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 서영은 작가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시인과 촌장의 저자란 사실보다도 김동리 선생의 어린 아내로 더 친숙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이 책 한 권만으로 서영은 작가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더불어 선망의 대상이었던 산티아고를 함께 느껴볼 수 있겠다는 설레임이 그저 이 책을 빨리 만나봐야 할 것 같은 간절함을 느끼게 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66세의 적지 않은 나이의 여성 작가가 유언장을 남기고 홀연히 순례길을 떠나게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도시와 세상의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 마주치게 될 자신의 모습이 궁금했던 것은 비단 작가의 마음뿐만은 아닐 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할 무렵 나에게는 작가 자체에 대한 궁금증 만큼이나 그녀가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궁금해졌고 5년 여의 준비기간을 마친 후 산티아고로 과감히 떠났던 낯선 인물과의 조우는 그만큼 많은 생각을 안겨 주었다. 어쩌면 이미 정해져 있던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떠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생에서 겪어보기 어려운 중대한 변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정해진 틀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그녀가 순례길에서 온 몸으로 쏟아냈을 자기 성찰과 또한 삶에 대한 애착과 의미에 대해 나 역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를 필요로 하는 온갖 심사에 치이고 때문에 밀린 원고와 한숨으로 씨름하면서 그녀는 문득 깨닫게 된다. 남들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이 지금 자신에게 있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작가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너무 멀리 떠나 온 것은 아닐까하는 기분이 좀처럼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문학을 시작할 무렵 자신에게 스스로 다짐했던 것은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삶이 양지로 변하는 것에 대한 목적이 아닌, 자기 소임을 선택한 자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글에 대한 폭식, 삶에 대한 폭식은 어느 순간 잠시 찾아든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둔중하게 뒤통수를 쳤던 묵직한 인식으로 그녀를 향했고 김동리 선생과의 인연을 포함한 모든 세상 속에서의 삶을 이제 그만 놓아버리고 싶은 운명적인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예전에 소설을 가르쳤던 학생들과의 만남에서 불쑥 찾아든 것이 바로 산티아고였다. 인생의 큰 고비때마다 걷기로 극복했던 과거를 돌아보면서 산티아고로 떠나는 것만이 그녀 스스로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체험이자, 절대적인 약속이라 느끼게 된다.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을 회상하며 나이가 지긋한 여작가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그리고 남편 김동리의 아내로 살아왔던 인생에 대해 조용히 되돌아보고 있다. 또한 소설가의 에세이니만큼 좋은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작가가 지녀야 할 필연적인 관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책 한 권을 통틀어 마음 깊이 새기고 싶은 문장이 너무나 많았던 책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되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베트남 호치민과 파리를 경유해 순례의 첫 출발지인 이룬에 도착하고 드디어 걷기 시작한 후 처음 만났던 담 모퉁이 밑돌에 새겨진 노란 화살표
그 작은 노란 화살표는 순례길에서 최초로 발견된 길 안내 표시이자, 또 다른 나와 마주친 첫 걸음이었으리라. 떠난 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이 주는 단조로움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길에 뒹구는 돌멩이 하나, 떨어진 낙엽 하나까지도 순연한 질서 속에서 조화로움으로 섞이고 있다는 사실을...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렸던 저자에게 노란 화살표는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그만 짊어지고 있던 그 모든 짐을 내려놓으라고,
삶은 집착이 아닌,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완성되어 가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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