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르트르에 따르면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고된' 것이다. 

내가 받아들인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선고된 자유 아래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무엇을 믿으면 좋을까'라는 물음 자체가 생길 수가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매우 행복한 상태로 살 수 있었던(98쪽) 옛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무엇을 믿을 지 온전히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불행하지만 행복한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다. 믿음의 대상은 종교일 수도 있고, 돈, 사랑, 명예, 권력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유를 동경한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자유로부터 도망쳐 '절대적인 것'에 속하고 싶어하(101쪽)는 경향이 많이 존재한다.

내 대학교 1학년 4월의 감정은 쓸쓸함이었다. 3월 활기찬 분위기가 지나간 후, 캠퍼스는 시험기간에 돌입한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고등학교 교실에서 벗어나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시험기간. 어색했다.  

그전까지는 시험기간이 다가올 때마다 칠판 한쪽의 시험범위 안내가 있었고,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시간을 같이 보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자 그 익숙했던 시험기간을 만날 수 없었다.(사실은 아주 억압적인 우리나라의 학교 체제 안에서나 가능할 모습들) 모든게 자율에 맡겨진 대학 생활에서 시험 기간을 챙겨주는 같은 반 친구는 없었고, 공부 안한다며 다그치던 담임 선생님도 없었다.  

분명 자유롭다고고 느껴야 했는데, 시험기간 내내 허무했다. 자유로운게 이렇게 쓸쓸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고, 그것은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내 동기들 모두가 공감했다. 

 

이렇듯 '자유'는 분명 우리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하지만 동시에 쓸쓸함으로 우리의 목을 죄어온다.  

이 책은 위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할 의무, 배금주의에 대해 반문할 수 있는 권리, 참된 지식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청춘이 과연 무엇인지에 관한 고뇌를 말한다. 계속하여 종교적 믿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우리의 직업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자꾸만 바뀌어가는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 노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안내해준다. 

고민하는 삶의 불쾌한 즐거움으로 안내되는 동안, 나침반 역할은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가 담당한다. 근대화 시기를 버텨낸 위대한 두 학자. 그들은 자유가 확산되면서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피폐하게 만들고 인간성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는지를 단순히 머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겪었다. 소세키는 그것을 문학으로, 베버는 이론으로 그려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세키와 베버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해부했던 근대 사회의 정체. 강상중은 그 모습을 그다지 어렵지 않은 모양새로 우리에게 다시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그런것일까... 읽고 나서 개운한 느낌이 아니라 더욱 더 침침해진 느낌이다. 안그래도 고민 많은 삶을 살고 있는 나인데, 이 책을 만남으로서 고민하는 삶의 정당성을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고.. 내 삶은 더욱 더 어려워졌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듯, 고민 끝에 낙이 올 날도 언젠가 있을까? 

 읽은 기간 : 2010년 10월 16일

정리 기간 : 2010년 11월 2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의 정체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출판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때도 해결하지 못했고 지금도 해결하지 못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과연 '한국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한국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책은 위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책은 아니다. 대답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최소한의 기반 마련을 해주는 책이다. 각 장의 제목을 살펴본다면 이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1장 :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2장 :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3장 : 정체성 판단의 기준

정체성이라는 문제가 대체 어떤 문제인지를 첫 장에서 소개한다. 그 다음 장에서는 위 제목이 암시하는 방향과는 약간 다르게 '보편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부분이 핵심적인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정체성 판단의 기준을 설명하는데, 저자가 제시하는 기준은 '고유성, 창의성, 주체성' 이렇게 세 가지이다.

3장에서도 마지막으로 다루어지는 주체성은 이 책의 후속작으로 봐도 무방한 『한국의 주체성』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어진다.

전체적으로 책의 구조와 특성을 살펴보았다. 그럼 각 장의 내용을 조금씩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나의 생각을 덧붙여보겠다.
 


먼저 제1장.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정체성 문제가 사실은 아주 어려운 형이상학적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테세우스의 배 문제와 같이 정체성 혹은 동일성을 다루는 문제는 수천 년 간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점을 간과하고 그저 '한국의 정체성'이 우리 마음대로 고민하다보면 결론이 나올 수 있는 문제인 양 고민해왔다. 저자는 이 점을 명시적으로 비판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이와 같은 태도에 비판적인듯 하다.
또한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것을 주문하는데, 이 논리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는 합성의 오류와 분할의 오류이다. 대다수 미국의 시민들이 각각 제국주의자가 아닐지라도 미국이라는 국가는 분명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SK가 현재 한국 프로야구 최강의 팀일지라도(2010년 10월 3일 현재. 준플레이오프 진행중. SK는 정규리그 1위) SK 소속 선수가 모두 각 포지션에서 한국 야구 최강의 선수는 아닐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특성이 한국이라는 집단을 확인시켜주며 그것이 정말 한국의 정체성을 확보해주는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는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저자의 실수 혹은 혼란을 볼 수 있다.  

43쪽, 나는 한국을 다른 나라나 민족과 구별짓는 특질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한국의 언어인 한국어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각 분야가 공통으로 갖는 속성이나 성질이다. 물론 한국어도 한국이 갖는 여러 공통 속성 중의 하나겠지만 한국어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이제 두 가지 가능성을 살펴보자. 첫째, 언어이다. 국어야말로 한 국가의 정체성을 확인해줄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지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특히 한국은 세계 유일의 한글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글로 한국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마치 한국인의 신원을 확인할 때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하는 것과 같다. 개인의 신원 확인에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하는 것은 그 번호가 다른 것과는 같지 않은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뭉니다. 즉 유일성에 의한 구별 방식이다. 따라서 세계에서 유일한 표기 방식을 자랑하는 한글이 이 번호에 해당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당시 영어공용어화 논쟁이 뜨거웠을 때라는 점을 배제하고서라도 한국어는 분명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저자는 한국어로 시작한 말을 어느샌가 한글로 바꾸었고, 그 둘을 완벽하게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듯 하다. 그러나 한국어와 한글은 분명히 다른 대상이다. 입말인 한국어와 글말인 한글은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는 두 대상이다. 물론 한국어를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글말이 한글이라는 사실이야 부인해서는 안되겠지만, 다른 대상은 분명 다르게 생각해줘야 한다. 두 번째 비판사항은 더이상 한글이 한국어만을 표시하는 글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도네시아 소수부족 찌아찌아족은 한글을 자신들의 언어 표기방법으로 채택하였다(관련기사 바로가기). 10년 전에 쓰여진 책이라 그 후에 일어난 사건을 들이대 비판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행위이지만, 이 책이 계속해서 유효성을 유지하려면 이 부분만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 다음으로 제2장. 한국적인 것이 과연 세계적인 것인가? 

저자는 보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철수, 영희, 민수는 존재할 수 있더라도 '인간'자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중세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쉽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페이겔스의 글을 인용해 글을 전개해나간다.

60쪽, "~(앞부분 생략) 이 인간적으로 창조된 질서는, 인간 의식의 변화하는 의도적인 시스템-믿음, 소망, 생각 그리고 감정-을 반영하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다(영원한 자연 질서와는 달리). 그것은 인간에 의해 창조된 질서이며, 그러므로 인간에 의해 이해된다." 그는 자연과학의 보편성을 인정할 수 있으나 인문학의 보편성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인용 부분이지만 저자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실제로 단어의 뜻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동시대에 같은 단어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각기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를 주는 단어의 존재는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가치'란 결국 '의미'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동일한 가치의 존재 또한 불가능해진다.  여기서 누구에게나 동일한 가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것' 다시말해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세계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보편적인 것이 존재할 수 없음)을 논증했으므로, 세계적이라는 말이 현실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장은 예상할 수 있다. 세계적인 것의 정체는 '미국적인 것'이다. 

74쪽, 따라서 세계화란 미국화를 모호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세계화란 보편화라고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화란 미국화라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즉 세계화란 미국화의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과제는 분명해졌다. 한국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각기 알아낸 후, 우리 안에서 미국적인 것과 어울리는 특성을 찾아내 그것을 상품으로 만들던지, 아니면 우리 안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미국적인 것과 어울리는 상품을 개발해 그것을 수출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은 모두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어서 제3장. 정체성 판단의 기준 : 현재성, 대중성, 주체성  

앞부분에서 다루어지는 고유성과 창의성은 한번에 다루어보자. 우리는 고유성을 생각하면서 시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이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땅에 포도라는 식물이 자라기 시작한 것은 200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프랑스 포도주는 왜 다른 모든 지역을 제치고 포도주로 유명한 곳이 되었는가? 이는 프랑스 지역 사람들이 포도를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재배하고 또 그렇게 재배한 포도를 이용해 독자적인 포도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원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외부에서 받아들인 문화를 얼마나 자신들의 개성에 맞게 독창적으로 가꾸었는지가 고유성 판단의 기준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문화를 독창적으로 고유화했는지 아니면 퇴락시켜버렸는지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기준은 나에겐 참 혼란스럽다. 내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일지 모르기 때문에 전문을 인용한다. 

97쪽, 그럼 문화의 창조적 수용과 퇴락의 기준은 무엇인가? 위의 예를 통해 보면, 보편적 가치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로 보인다. 바둑의 경우 잡기보다는 도예가 더 높은 가치이며 보편적이다. 또한 유교에서 인권을 탄압하는 것보다는 인권을 신장하는 것이 더 높은 보편적 가치이다. 문화의 현상적 차이와 구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경험론자의 입장이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인이나 흄의 동시대인과는 달리 희랍인들은 남색을 권했다. 흄은 이것이 "우정, 공감, 상호 애착 그리고 충실함의 원천으로서" 행해진 것이라고 말한다. 즉 남색 자체는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권장되는 것이 아니지만, 남색의 바탕이 되는 성질들 즉 우정, 공감, 상호 애착 그릐고 충실함은 "모든 국가와 모든 시대에서 존중받는 것"이다. 이런 경험론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지금까지의 관찰에서 보편적으로 발견한 가치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때의 보편적 가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가치로 이름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목표를 정하거나 평가를 할 때 편의상 보편적 가치라는 표현을 쓴다. 창조적 수용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창조적 수용의 기준은 인류가 지금까지 관찰해온 일반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조치훈처럼 도 닦는 자세로 바둑을 두는 개별자가 존재한다. 인권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억압받는 개인은 존재한다. 

2장에서 보편성을 다룰 때는 '존재하지 않는 보편적 가치'라는 표현을 하고, 이어서 보편적인 것 즉 '세계화'란 '미국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존재하지는 않지만 추상적으로 이름만 있는' 보편적 가치를 말하고 있다. 내가 받아들이기로는 2장에서 말한 '보편적인 것'과 3장에서 말하는 '보편적인 것'이 서로 약간 다른 개념으로 쓰이는 것 같은데, 정확히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아니면 누군가가 이 부분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 분명 지금 내 생각에 뭔가 잘못된 점이 있을 것이다.
 

이제 중요한 부분. 현재성과 대중성과 주체성이다. 

어렵게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표제어 자체가 워낙 명시적이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현재성은 말 그대로 '지금' 한국에서 유효한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찬란한 과거의 유산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 우리의 내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 탐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반대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생각해봐야 할 항목이다.대중성도 마찬가지로 명료한 개념이다. 저자는 대중문화를 절대 무시할만 한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다수가 좋아하고 염원하고 편하게 느끼는 무엇인가'이며, '시대의 정신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108쪽) 마지막, 주체성. 딱히 할 말이 없다. 내면을 살펴야 한다는 것인데, 주체성 항목은 이 부분에서 다루기보다는 다음 책을 통해 고민해보는게 좋겠다.  

전체적으로 아주 깔끔한 논리전개가 돋보이는 책이다. 내 나름으로도 이 책의 형식을 흉내내어 서론부에 전반적인 조감도를, 각 부를 다룰 때도 초반에 안내사항을 게시하려고 노력해봤는데, 다시 읽어보니 아직 멀었다는 생각뿐이다. 그리고 3장 마지막 부분에 보편적인 것을 논하는 부분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질 못해서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글을 '간단하게'쓰는 능력을 연마해야겠다. 불필요하게 긴 글이 되어버려서 혹시라도 읽으실 분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읽은 기간 2010년 9월 21일 ~ 2010년 9월 23일 

정리 2010년 10월 3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닌 서평을 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항상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압박감 때문에 천천히 서평을 써 볼 여유 있는 시간을 만들지 못했었는데, 오늘은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 때문에 이렇게 서평을 써보려고 한다.

자본주의. 정확히 어디서부터 생겨났으며,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라났으며, 대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이 괴물. 누구나 이 괴물 때문에 마음 아팠던 적, 상처받았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들과 반대로, (속물적 근성에서 오는)우월감이나 우쭐함을 느껴본 적도 있을 것이다.  

당장 나를 돌아보더라도, 어린 시절 돈과 관련된 안타까운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 정확히 몇 살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와 함께 네 살 아래 여동생의 물건을 사러 문방구에 간 적이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동생의 선물을 사러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당시 나는 아주 큰 박스에 담긴 장난감을 갖고 싶었고, 엄마는 그런 나의 손짓을 매우 미안해하고 또 난처해하는 표정과 함께 거절했던 기억이 난다. 그 순간 나의 내면에는 무슨 생각이 자리 잡았을까? 굳이 쓰지 않아도 다들 짐작할 수 있으리라. 물론 지금은 부모님 명의로 된 아파트에 네 식구 가족이 잘 살고 있기에 그 어려웠던 시절은 ‘그저 그 때’의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보다 훨씬 전에,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엄마한테 들어서 알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내가 세 살 꼬맹이였을 때 옆집 아주머니께서 과자라도 사먹으라고 천 원짜리를 주신 적이 있는데, 세 살의 나는 그 천원을 ‘버렸다.’  

손 안에 들어온 ‘돈을 버린’ 나의 내면과 엄마가 나에게 장난감을 사주시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 집에 돈이 많지 않아서’라는 점을 알고 있던 나의 내면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돈을 버린 나에게는 화폐, 혹은 돈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였지만, 돈이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나에게 돈이란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어떤 것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경험이 이럴진대, 의식적으로 기억해낼 수 없는 의식 너머의 기억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을까?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는 개인으로서의 우리가 자본주의에 의해 어떻게 상처받으며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첫 장에서 이상과 짐멜을 통해 돈이 어떻게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지부터 시작하는데,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20년대 모던보이 이상의 적나라한 내면의 실체를 바라보고 있자니 솔직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모르고 있던 부분이 드러났는데 그 드러난 부분이 너무나도 불쌍해서, 그리고 그 불쌍한 부분이 너무나도 나와 같아서 처음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의『날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쫓던 ‘모던함’은 결국 ‘돈’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얼마라도 좋으니 왜 지폐가 소낙비처럼 퍼붓지 않나, 그것이 그저 한없이 야속하고 슬펐다. 나는 이렇게밖에 돈을 구하는 아무런 방법도 알지 못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좀 울었나보다. 돈이 왜 없냐면서.(65쪽)

책을 읽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자니 3년 전 대학 신입생 시절이 떠오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용돈은 한 달 3만원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돈이 매달3만원이긴 했지만 딱히 필요한 것도 없었고, 또 내 수준을 넘어서는 것들은 부모님이 해결해주셨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문방구의 기억 때문인지, 난 부모님을 힘들게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요구는 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들 중에서도 무리한 요구가 있었기에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한 달 3만원으로 지내던 나였는데, 대학교에 가보니 한 달 3만원으로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던 나는 입학 전부터 친척 어른들에게서 받은 상당한 용돈이 있었고, 거기에 더해 부모님이 난생 처음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나에게 한 학기동안 잘 써보라고 통장에 넣어주셨다. 그런데 ‘돈 쓰는 맛’을 난생 처음 알게 된 나에겐 지출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대략 120만원을 단 두 달 만에 다 써버렸다. 기억에 남는 지출도 없다. 그저 놀러 다니고, 밥 먹고, 술 마시는 데만 그렇게 돈이 새나갔다.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마음 속 허무함은 커져만 갔고, 결국 잔고가 만 원 대로 내려앉는 순간 마음 속 허무함은 육체적 무기력함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날개』의 주인공(=이상)이 돈의 가치를 알게 되자마자 곧바로 느끼는 ‘돈이 없다’라는 느낌을 다시 생각해낼 수 있었다.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이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느꼈던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들은 결코 지금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공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여러 사건들을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

두 번째 장의 보들레르와 벤야민 부분은 패션의 에로티시즘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푹스에 따르면 패션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합니다. 첫째, 패션은 예링이 지적했듯 상류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계급적인 구별을 두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패션은 계속 매출을 올려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션은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 또한 중요합니다.(141쪽)

우리는 왜 계속해서 옷을 살까? 분명 옷장에는 지금 당장 입고 나갈 수 있는 옷들이 몇 벌 있지만, 옷장 앞에 서면 항상 뭘 입을까 고민되고, 집을 나서는 순간 사람들의 옷을 관찰하고 또 옷가게 앞을 지나가면 한 두번씩 슬쩍 쳐다보게 된다. 그런 궁금증에 대해서 위의 견해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얘기야 지금까지 나도 생각해봤던 점이었지만, 세 번째 주장은 꽤 신선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에로티시즘이라고 해서 반드시 섹스를 이루어내기 위한 옷차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단지 이 경우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외출할 때, 누구를 만나러 갈지에 따라 의상이 바뀌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성끼리 만나는 경우와 이성을 같이 만날 경우의 옷차림이 다를 것이고, 동성끼리 만난다고 해도 그들이 가는 목적지가 어딘지에 따라 옷차림이 또 달라질 것이다. 이 점을 왜 지금까지 패션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에 포함시키지 못했을까? 앞으로 옷을 사고싶은 욕망에 대해 생각해볼 때 항상 세 번째 이유를 빼먹지 말아야겠다.

세 번째 장에서는 투르니에와 부르디외 두 명이 등장한다. 이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키워드는 바로 ‘허영’.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래 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287쪽)

위 인용문은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자의 다른 책들을 전에 읽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위 인용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나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내 내면의 허영을 다시 한 번 제대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런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것일까. 순수하게 탐구하고 싶은 마음에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주변 친구들과 나 자신을 ‘구별짓기’하고 싶은 욕망을 눈감을 수가 없다. 그저 그런 자기 계발서를 읽는 친구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는 내 모습은 절대로 순수하지 못한 것 같다. 어제 밤에도 친구와 책에 관한 얘기를 하는데 친구가 스피치에 관한 어떤 책을 추천했고, 나는 실용서는 보지 않는다고 말하며 친구의 추천을 거절했다. 독서에 대한 나의 취향은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과외를 꾸준히 하면서, 부유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모자르지 않을 만큼 돈을 벌고 있는 내가 왜 자꾸만 돈 문제를 가지고 내가 피해를 입은 것처럼 묘사하는 걸까. 모두 나의 내면 속 허영덩어리가 만들어낸 결과 같다. 슬프다. 갑자기 글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 이런게 저자가 말했던 불편함일까. 자본주의에 관한 책이었지만, 자본주의는 물론 나 자신을 심각하게 되돌아볼 수 있었던 책이다. 이제 그만 써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