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하려면 국어부터 잘하고 외국말 잘하려면 한국말부터 잘해라
남영신 지음 / 리수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개정판이 나오면서 절판되었습니다.(개정판 바로가기

독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작년 이후, 언어에 대한 관심은 나날히 늘어만 갔다. 특히 지난 겨울에는 아예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더 나아가 언어 제국주의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 때 남영신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다. 한국어를 사랑하는 분들 중에 한 분이구나 하고 이름만 알고 지냈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그분이 쓰신 단행본을 제대로 읽어봤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장부터 8장까지는 이런저런 분류로 나뉘었지만 결국 우리가 우리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상들을 짚어보고, 어떤 우리말을 쓸 수 있는지 안내해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마지막 9장과 10장에서는 지은이가 품고 있는 우리말에 대한 생각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미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버렸지만 영어공용어화에 대한 10장의 논의는 지금도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 전체적으로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우선 인상깊은 부분으로는 1장의 외래어 표기에 관한 부분이었다.  

(27쪽) 외래어 표기는 내국인을 위한 것이지 그 나라 현지인을 위한 것이 아님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가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결정할 문제인 것이다. 현지 발음은 우리가 표기 원칙을 정하는 기준이 되고 또 판단 자료로서 중요한 것이지 그것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우리나라를 ‘대한민국’, ‘대한’, 또는 ‘한국’으로 불러 주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하나도 없다. 가장 가깝게 불러주는 일본인들의 발음이 고작 ‘칸고꾸’이고 베트남의 발음이 ‘따이한’인 것이다. 우리의 서울도 마찬가지이다. 중국 사람들에게 서울로 불러달라고 항의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漢城(한성)을 고집한다. 서울 올림픽 결정 소식을 알리는 사마란치 의장의 선언에서 ‘세울’로 발음했던 것을 우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는 서울의 영문 표기인 seoul을 자기 식으로 발음했던 것이다. 이를 누가 막는단 말인가?
  

다른 나라의 고유명사를 어떻게 우리말로 표기할 것인지는 큰 어려움 없어보이면서도 또 생각해보면 이런저런 생각거리가 많은 부분이다. 일례로 중국이나 홍콩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예전엔 우리식 한자음으로 표기했었지만, 몇 년 전부터 그들의 이름을 현지 발음 그대로 표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었다.(모택동->마오쩌둥, 손문->쑨원, 성룡->청룽 등) 그런데 새로 소개되는 유명인사들의 이름은 그런대로 잘 정착되는가 싶었는데, 워낙 수십년간 쓰여서 익숙했던 이름들은 여전히 우리식 한자음으로 불리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 나는 과연 어떤 표기를 따라야 올바른 것일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왔는데,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입장정리가 조금은 된 느낌이다. 외래어 표기라는 것 자체가 외국의 말을 자국민이 알아듣기 위해 표기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보기 보다는 우리가 편하게 쓸 수 있는대로 표기하는 것이 올바른 일 아닐까? 이렇게 말한다면 그 나라 말을 배울 때 불편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박할 사람이 있을텐데, 다으의 구절이 그 반박을 다시한번 봉쇄해버린다. 

(21쪽)   어느 경우에나 한국인끼리 쓰는 외래어는 결코 외국어와 같을 수 없다. 따라서 외래어를 많이 알고 자주 쓰는 것이 외국어를 잘하는 지름길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은 외국어 자체를 익히는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외래어를 자주 쓰는 것은 외국어 발음을 익히는 데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내가 할 줄 아는 외국어라고 해 봤자 영어 한 가지인데, 이 부분을 읽고 나니 내가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단어들 중에 꽤 많은 단어들이 우리가 평소에 쓰는 영어 단어라는 점을 알았다. 내가 실제로 절절하게 느낀 예로는  jog가 있다. 우리는 평소에 '조깅'이라는 말을 참 많이 쓰고, 발음은 한국어 발음대로 /조깅/이라 발음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한국어 발음 /조깅/에 익숙해진 나는 영어로 대화하던 중 jogging을 말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dƷɑ:gɪŋ]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전까지 영단어 jogging을 말해본 적이 없었기에 나타난 문제였는데, 외국어 발음은 외국어 자체를 통해서만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을 절절히 느낀 순간이었다.

   

 

두 번째로 인상깊게 본 부분은 다은 부분이다. 책의 원문과 약간 다르게 편집했다. 

29쪽왜 꼭 우리말인가

문화가 유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다만 국어 발전에 유익한 방향으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워서 외래어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하자는 것.

예, 라디오: 영단어 radio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전파를 받아 소리를 내는 기계’라고 의미가 굳어짐. 그로 인해 ‘라디오’가 생산해 내는 2차 파생어가 거의 없다.(텔레비전도 마찬가지)

예, 부팅booting이라는 용어 : 우리나라에서는 컴퓨터에 관해 말할 때만 쓰이는 용어. 그러나 컴퓨터를 처음 기동起動하거나 프로그램을 컴퓨터 기억 장치에 올리는 것을 꼭 ‘부팅’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영어 사용자들도 ‘booting’을 그런 용도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해당 언어권 내에서 한 단어는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뜻이 바뀌고 확장되는 것. 그런데 단어가 그 언어권을 떠나면 이런 특성들을 상실. 우리는 그 용어를 한 기계나 한 기능에 맞춰서 수입했기 때문. 만일 우리말 ‘띄우기’로 바꾸어 불렀다면, 우리 단어 ‘띄우다’에 이제까지 없던 ‘컴퓨터를 작동함=컴퓨터 상의 booting'의 뜻을 추가할 수 있다. 이는 우리말을 알차고 의미 깊게 만들어 주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만일 컴퓨터가 ’셈틀‘로 불렸다면, ’셈‘이라는 말과 ’틀‘이라는 말이 현대적으로 다시 나타남. 이제까지 ’컴퓨팅‘으로는 회계도 하고 기계도 제어하고 우주선도 발사했지만, ’셈‘으로는 오로지 어린이들의 산수 공부정도나 떠올릴 수밖에 없다. 중국인들이 텔레비전을 电视라는 한자어로 바꾸어 사용하는 깊은 뜻을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compute‘의 뜻 : reckon or calculate. 라틴어 유래. com-'together' + putare-'to settle' / ’세다‘의 뜻 : 수효를 헤아리다)
  

어째서 우리말은 전문용어로서의 자리를 확실히 잡아가지 못하는가에 대해 생각할 때 큰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다. 단어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지만, 단독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맥락이나 분위기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그 분위기와 맥락이 달라짐에 따라 단어도 기본적인 뜻을 유지한 채 다양한 뜻으로 변주될 수 있다. 영단어 compute는 원래 고려하다 혹은 계산하다라는 뜻이었다. 그토록 간단했던 일반적 단어 compute는 계산하는 기계인 computer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의미를 표시할 수 있게 되었다. computing으로는 회계도, 기계 제어도, 우주선 발사도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 computer가 우리말로 수입되는 과정에서, 원 뜻인 '계산하다'라는 의미는 배제된 채 기계로서의 '컴퓨터'가 수입되었다. 그 결과 compute와 동일한 뜻을 말할 수 있는 '셈'은 의미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제는 초등학생들도 잘 쓰지 않는 용어로 전락해버렸다. 외국에서 발생한 개념이나 제도를 우리말로 번역.수입할 때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 나름의 의미를 제공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 내용을 따와서 생각을 적는건 이정도로 마치기로 하자. 책을 읽으면서 중간중간 느낀 점이 있었는데, 바로 '과유불급'이라는 말이다. 나는 평소에 한국어를 사랑한다고 자부하며, 영어로 대표되는 외국어의 우리말 침투를 결코 곱지 않게 바라보는 한국인이다. 민족주의에 쏠려 있다고 비판한다면 사실 할 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100% 반박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런 나조차도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가끔씩 '이건 좀 '오바'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의 변화를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는 문제이지만, 이미 언중의 대다수가 편하게 느끼는 말의 변화를 이렇게까지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이 외래어의 무분별한 수용까지도 갈 수 있다는 점을 나도 알고 있지만, 저자의 주장이 때로는 과격해보일 때가 있었다.  

지금 주어진 현상을 바꾸려는 사람의 주장은 원래 근거가 다양하고 또 많은 의견이 제시될 수밖에 없다. 그걸 들어줄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잡아끌 수 있을지는 모든 진보적 지식인들의 숙제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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