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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평점 :
처음으로 진주에 간 날, 하늘이 파랬던 것이 기억난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4박 5일로 기획된 수학여행은 버스를 타고 남도 지방의 명승지를 돌아다니는 여행이었다. 1년 전인 고1 때는 무주에 있는 해병대 캠프에 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즐거운 수학여행이었다. 거의 내내 버스를 타고 보성 녹차밭이나 순천 갈대밭 같은 유명한 곳을 찾아다녔는데 진주에는 가장 마지막 순서로 간 곳이었다. 우리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떨어졌다는 정자와 임진왜란 때 치열하게 전투가 일어난 진주성터를 돌아보았다. 내게 잠시 스쳐 간 남도의 도시인 진주는 이 소설의 화자이자 작가의 아버지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교도소가 있는 도시이며, 열 살 때 그리고 수십 년 후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작가가 방문한 곳이다. 나나 작가에게나 낯설었을 도시에 대한 기억은, 작가를 사로잡고 끝내 하나의 언어가 된다.
다수가 기록하기로 합의한 기억은 역사가 된다. 버려지는 기억들은 무엇이 되는가. 무너진 신전의 기둥, 부서진 항아리의 조각, 누군가가 여기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화 된 부재.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기에 쓸쓸하지도 서글프지도 않는 기억들. 그러나 딸은 기억해 낸다. 붓을 들고 허리를 숙인 채 땅속을 털어낸다. 역사의 쓰레기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져 간다.
기억을 닮은 소설은 물속의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 수선집을 운영하신 어머니. 계속 아버지를 찾으며 대문을 두드리는 사복 경찰. 어느 날 집에 눌러앉아 버리는 하얀 개. 그리고 아버지, 부재했지만 항상 곁에 존재했던 아버지. 마침내 감옥에서 나와 바로 옆에 존재하게 되었지만, 부재했던 시절의 그림자에 휩싸인 아버지. 보통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언어화되지 않은 짤막한 장면의 연속이고 이 소설의 글들은 그런 장면의 연속을 닮아있다. 어린 시절의 화자는 고독해 보인다. 이어지는 언어의 여백 속에서 ‘고독’하다는 말은 쓰여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끝없이 ‘부재’에 대해서 말하는 화자의 말에는 혼자 가로질러갈 운동장, 말없이 책을 읽는 눈동자, 말하기를 그만두고 다무는 입이. 읽힌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작가가 어린 시절 쌍둥이처럼 뺨을 맞대고 지내던 고독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혼자 지내는 아이의 모습은 불안하게만 하지만, 그런 고독 속에서 이런 언어가 탄생하기도 한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기억과 화해하기 위해서 쓰기도 한다. 나는 이 소설의 작가가 이 같은 마음으로 글을 썼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다만 짐작할 뿐이다. 모든 아이는 부모를 사랑하고 어느 순간 실망하기 마련이다. 작가는 불행한 어린시절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분노하던 순간이 하나도 없었을까. 나는 화자가 부재하던 아버지에 대해서 씀으로써 그 기억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한다. 화해의 종소리가 울리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나는 언제쯤 과거의 분노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이제는 이 책을 읽으며 사로잡힌 내 기억에 대해서 말할 차례다. 내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전화를 걸어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술을 먹으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술을 먹지 않을 때는 내게 하나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무책임한 가장이었다. 앞에서 말한 수학여행을 가기까지도 곡절이 꽤 많았다. 수학여행비를 제때 내지 못해서 허둥되었고, 그전에도 몇 달 동안 급식비를 제때 내지 못해서 학교 행정실에 몇 차례나 불려가 행정실 직원에게 추궁을 당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존재했으나 부재했다. 벌써 10년 전의 기억이지만 그때 느끼던 모멸감과 버려졌다는 기분이 생생하다. 나는 언제쯤 기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진주>의 작가는 십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게도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때때로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러나 그때도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해왔던 것들. 푸른 하늘, 석양 속에서 걷던 하교길, 잠을 자고 깬 뒤 느껴지던 적요로움. 그런 것들이 나를 살게 해왔음을 알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내게도 언어가 들려오는 순간을, 그 긴 시간을 견디고, 기다릴 수 있음을 지금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