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소설집
정세랑 지음 / 아작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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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SF를 쓰는 작가는 흔하지 않았고 그중에서 주류 문학계에게 인정받는 작가는 더욱 희귀한 편이었다. 예시를 들자면 배명훈, 윤이형, 정세랑 이렇게 셋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세랑 작가는 이 <목소리를 드릴게요> 이전에도 여러 SF소설을 써 왔다. 작년에 재판으로 출간된 <지구에서 한아뿐>은 무려 SF로맨스물 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인 한아는 오래된 옷을 수선해 새 옷을 만드는 환경 최소주의자로 설명되어 있다. 소비제일의 자본주의가 지구를 파멸로 몰아갈 것이라는 인식은 <지구에서 한아뿐>에서는 생태주의를 주창하는 여러 단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생태주의를 첫 번째로 보여주는 소설은 <리셋>이다. 석유화합물을 먹는 거대 지렁이가 갑자기 등장해 문명을 리셋시킨다는 황당한 줄거리는 붕괴한 문명의 생존자들이 대재앙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는 문명을 탄생시킨다는 결말로 끝이 난다. <7교시>는 육식에 대한 미래인의 관점이라는 소재로 만들어진 단편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공장식 축산이 인류역사상 최악의 범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실제로 이러한 전망에 반성을 느낀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비거니즘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 세계관의 한계는 결과적으로 현재 문명이 완전히 사라지는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우리의 잘못을 수정하지 못한다는 체념에 바탕하고 있다고 보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미래를 두려워하기에 매 시대의 인간은 온갖 이유로 세계가 멸망한다고 생각했다. 1960년대의 세계인이 가지는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현재 세계의 파국에 대한 불안함 중 어느 것이 더 컸을까?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 핵전쟁은 실존하는 공포였다. 나는 인간의 미래를 낙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비관하지도 않는다. SF의 주요 태마는 경외감이지 공포가 아니다. 적어도 몇몇 소설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모양의 문명을 그리지 않았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대파괴의 시대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맛이 없다.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자학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다. 마치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잘못이라고 알고 있다는 듯이.

 

이러한 생태주의 SF와 다른 면에 있는 소설이 바로 <모조 지구 혁명기>일 것이다. 이 소설은 진화학에 반대편에 있다고 주장하는 창조론에 대한 위트있는 야유다. 많은 창조론 지지자들이 자연이 만들어지는 패턴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이유로 우리를 창조한 조물주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그런 조물주는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 조물주가 만든 지구를 본딴 <모조 지구>는 최악의 모조품이다. 많은 창조물이 지적설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 인어를 본뜬 생물은 기괴하고 천사의 등에서 날개가 돋아 나는데 그 과정이 아프고 날개는 쓸모가 없다. 다들 아름답다기 보다는 그로테스크한 장애를 하나씩 가지고 태어난다. 결과적으로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지구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살며, 진화했기 때문이다. 우리 세계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을 느낀다. 인간은 지구의 적대자로 그려지지만 결국 지구에서 벗어난 순간 인간은 살아남지 못하는 지구의 아이들인 것이다.

 

<리틀 베이비플루 필>은 새로 등장한 신기술이 인간들에게 어떤 영향과 부작용을 줄지에 관한 전형적인 서사를 보여주었다. ‘부작용이 없는 것이 부작용이었다.’라는 말은 참 아이러니함으로써 소름끼치게 읽혔다. 결과적으로 이 소설의 세계관은 새로운 기술이 초래한 결정적 파국에 대해서 말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짚어가는 것은 꽤 재미있는 소재였지만 결국엔 변화에 대한 사유만 남은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듯 본격적으로 SF를 시도한 정세랑 작가의 소설들은 내게 약간의 호불호로 갈렸다. 그래도 좋았던 작품을 쓰자면 앞에서 썼던 <모조 지주 혁명기><목소리를 드릴게요>를 뽑고 싶다. 두 소설의 공통점은 소설속 인물들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정세랑 스타일과 SF가 효과적으로 결합한 소설이라는 생각도 든다. B급 감성이 살아있는 펀치라인이 있는 대사들도 너무 좋았다. 길게 글을 써왔지만 내가 아쉽다고 말한 소설들도 사실은 재밌게 읽었다. 더 많은 SF소설을 써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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