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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평점 :
한강 작가의 빛나는 수상경력과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읽은 것은 얼마 전에 읽었던 여수의 사랑이 처음이었다. 작가가 등단하고 나서 초기에 썼던 소설들을 모아놓은 것임에도 그 독서는 만족스러운 것이었고, 한강이라는 작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읽게 된 이 책 ‘눈 한 송이가 녹는 순간’은 정확히 말하자면, 제 15회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을 모아놓은 작품수상집이다.
이전에 읽었던 여수의 사랑은 작가로서 초창기에 쓰여 진 작품이고 이번에 읽은 이 책은 비교적 최근에 쓰여 진 작품이다. 그 사이의 간극은 거의 20년 정도로 거의 내가 자라고 지금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 정도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 긴 시간 사이의 간격을 나는 단번에 뛰어넘고 2015년의 한강 작가의 글쓰기를 목격했다. 그 간격이 다른 작가로 보일만큼의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성장하고 변화한 글쓰기였다.
‘눈 한 송이가 녹는 순간’은 작가 한강의 아바타라고 할 수 있는 작가‘나’의 앞에 예전에 같이 일했었던 임 선배가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평범한 스토리 같지만, 나를 찾아온 임 선배는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은 상태다. 나는 죽음에서 돌아온 임 선배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두 사람은 나가 17년 전에 잠시 일했던 출판사에서 선후배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러나 나가 글쓰기를 위해서 회사에서 퇴사를 하고 두 사람은 수 년 동안 별다른 접점 없이 지낸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회사에서 다 같이 놀러간 콘도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나 회사가 일찍 끝난 날.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월미도로 놀러간 것 같은 이야기. 여기에 두 사람의 이야기에 한사람이 더 등장한다. 임 선배와는 다르게 나와 더 친했고 퇴사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했던 사람이다. 그쯤에서 대화는 나가 몰랐던 경주언니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나가 퇴사한 이후, 결혼을 하게 된 경주 선배가 회사의 부당한 퇴사 압력에 저항하다가 퇴사한 일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 죽은 자와 함께 죽은 자에 대해서 얘기하던 나는 문득 밖에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을 목격하며,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여수의 사랑을 먼저 읽어보았기에 자연스럽게 그 소설집과 이 소설을 자연스럽게 비교하며 읽게 되었다. 어느 쪽이 더 좋다는 말보다는 모두 훌륭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양쪽 다 인간개인과 사회 사이의 불화로 고통 받는 인간을 묘사했지만, 방향성이 달라졌다. 여수의 사랑은 가족력이나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서 고통 받았고, 이 소설의 경우에는 오히려 사회의 시스템으로 개인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죽은 임 선배가 하필이면 경주언니가 직장에서 저항하는 모습을 얘기한 것에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이 쓰여 지기 일 년 전에는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없었더라도 나는 이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겠지만, 시대 때문에 더 의미 있게 다가온 것도 사실이다.
이 수상집에는 한강 작가의 수상작 외에도 9명의 작가의 소설이 더 실려 있다. 그 중에는 반가운 이름도 있고 소양이 부족한 나에게는 낯선 이름도 있다. 차례대로 간략하게 소개한다.
강영숙의 <맹지>는 파편적이 장면의 사건이 난무하면서 서사가 흐릿한 평소에는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스타일의 소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글을 읽음으로서 자연스럽게 사소하지만, 불길한 고장의 모습이 생생하게 생각났기 때문일 것이다.
권여선의 <이모>는 제 3자의 입에서 타인의 생을 증언하는 형태의 소설이다. 다소 전형적이라고 느껴졌지만 그렇기에 더욱 쉽게 받아들이고 작가가 구축한 ‘이모’의 모습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피키달리 서커스 근처>의 작가 김솔은 이전에 읽었던 젊은 작가 수상집에서 먼저 접해 보았기에 구면인 작가다. 이 작가는 특이하게 소설의 배경이 유럽이고 등장인물들도 유럽인들이다. 전에 읽었던 소설인 <유럽식 독서법>은 다소 모호한 서사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데 이번 경우에는 이야기의 힘이 독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휘어잡는 소설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인 작가가 한국인을 소설에 등장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세계 성을 획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정말 특이한 작가고 소설이기는 했다.
<입동>의 김애란 작가는 우선 이름이 반갑게 느껴졌다. 여태까지 나온 그의 책을 모두 읽어 보았지만, 문예지는 읽지 않기에 작가의 신작은 접하기 어려웠기에 오랜만에 접한 작가이기도 했다. 김애란 특유의 차분한 문체를 따라서 소설을 읽어 나가다가 중간에 한번 놀라게 되고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이 작가가 정말 소설을 잘 쓰는 작가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임시교사>의 손보미는 최근 좋아하게 된 작가지만, 이 소설은 취향이 맞지 않았다. 인간관계의 미묘한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끄집어내고 구체화시키는 데에는 성공적이었지만,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스토리와 소재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어서 약간 재미가 없었다. 그래도 잘 쓰인 소설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이기호는 유쾌한 분위기와 나사가 하나쯤은 빠진 등장인물과 사건 속에 사회비판적인 요소를 잘 담아내는 작가다. 이 소설의 경우에는 사회비판적인 내용도 포함했고 그와 더불어서 선한 사람들의 소시민적인 심리를 잘 표현했다고 느껴졌다. 잘 만들어진 수작이었다. 애초에 시점자체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시작되었기에 결말 또한 그저 상황이 변화는 것을 목격하는 것으로 끝나서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제의 일>의 작가 정소현은 처음 접하는 작가였다. 머리에 심한 충격을 받고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여자가 우연히 만난 옛 친구에 의해서 과거가 침범 당한다는 스토리가 이 소설의 골자다. 개인적으로 결말 부분의 과거가 얼마나 괴로웠든 현재의 삶은 살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에는 공감하지만, 동시에 기억을 잃어버림으로서 완전히 유리된 고통이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와서 어떤 의미가 있는 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또한 몇몇 등장인물들의 무기력한 대응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예를 들자면 ‘나’의 고모 같은 인물은 다 큰 성인이 가족을 믿기보다는 타인의 말을 더 믿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와 관련된 설명이 없으니 이 사람은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물의 작별>은 위에 먼저 쓴 <이모>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번에는 고모가 주인공이다. 치매에 걸린 고모를 위해서 조카가 고모의 첫 사랑을 찾으면서 수소문 하는 내용이다. 치매 때문에 잊혀지는(혹은 강렬해지는) 첫 사랑의 기억을 탐색하는 로맨스 소설 같으면서도 배경이 된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에 대한 묘사도 빠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두 요소가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로 만들어진 잘 짜여 진 소설이었다.
황정은 작가는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내 취향과는 너무 다른 작가이기에 읽을 때마다 난감하다. 독백체의 문장은 이 작가의 특징인데, 그 특징이 나 한태는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는 애매한 느낌이 들었다. 문체는 정말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의 서사가 흐릿한 것은 내 취향과는 너무 다르기에 반씩 합쳐서 애매하다는 평가를 한다.
수상 작가의 인터뷰가 없는 수상집도 있지만, 실려 있는 수상집도 그다지 신경 써서 인터뷰를 읽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에는 인터뷰어가 상당히 신경 써서 준비했는지 내용이 충실하고 작품의 이해에 큰 도움을 주는 내용이 많았다. 그를 넘어서 한강 작가의 문학세계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알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