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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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잘 정리된 방이 떠오른다. 넓은 창이 하나 달려 있고 창을 통해서 들어온 빛이 방안을 부드럽게 밝혀진다. 포근한 이불이 덮인 침대도 하나 있고 방주인이 썼을 법한 책상에는 여러 권의 책이 꽂혀있다. 엔트로피는 쉽게 말해서 이렇게 정리된 방이 개판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더러워지는 방을 치워주는 주인이 없다면 집은 개판이 된다. 집안은 먼지로 뒤덮일 것이고, 누군가가 던진 돌멩이에 창문이 깨진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먼지를 어디론가 쓸어가고 집을 수리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바람은 방을 더욱 흐트러트릴 뿐이다. 집안을 치워주는 사람이 없다면 집은 개판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이 우주의 법칙이다.

 

그리고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 인생도 가만히 있으면 점점 더 나빠지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젊을 때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나이 들어 나쁜 직업을 얻고. 나쁜 직업을 얻은 사람은 건강을 잃을 확률이 높다. 인간은 다양하고 그만큼 인생도 다양하지만, 인생의 몇몇 나쁜 징조는 인간을 더욱 깊은 수렁으로 이끌기도 한다. 인간의 생이란 결국엔 그 수렁에서 한 발짝이라도 더 멀어지려는 투쟁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끝없이 어질러지는 방을 치우는 것과도 같다. 집을 어지르는 게 싸가지없는 동생이라면 등짝이라도 때릴 텐데 무시무시하게도 집을 어지르는 건 우주의 법칙이다. 이건 뭐 답이 없다.

 

권여선의 <아직 멀었다는 말>에는 우주의 법칙처럼 끝없이 나빠지는 인생이 더러 등장한다. <손톱>의 주인공 소희는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언니의 돈을 들고 집을 나간 경험을 했고, 최근엔 언니가 소희가 모은 돈을 들고 도망친다. 소희는 겨우 이십대 초반이지만 자신의 미래가 훤히 보이는 인생을 살고 있다. 그 인생은 조금 더 나은 생활을 위한 장기적인 플랜이다. 그를 위해서 소희는 질 나쁜 일자리에 목을 메야하고 모든 일에 대해서 금전적인 계산을 하며 살아간다. 짬뽕을 더 맵게 할 500원이 아까워서 중국집에서 나오기도 한다. 우주의 법칙에서 이겨내기 위해서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지만, 우주의 법칙은 점점 나빠지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그녀는 뜻하지 않는 부상을 얻는다. 그런 부상은 소희의 계획에 없는 일이었기에 그녀는 치료비 7만 원을 포기한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예측할 수 없음을 예찬하고 도전하라고 하지만 이 사회에서 우리는 예측되는 뻔한 인생을 두려움 섞인 눈으로 바라본다. <손톱>은 그렇기에 예외적인 서사는 아니다. 뻔하고 뻔하다. 예외 없이 꽉 막힌 소희의 인생처럼 공짜 껌을 씹는 노파의 인상은 뻔한 결말이지만 그렇기에 섬칫하다.

 

<너머>에서 보여주는 인상은 손톱과도 비슷하지만, 조금은 미묘하게 다르다. 여기서도 서사는 비슷하게 진행된다. 젊지 않은 나이, 기간제 교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알력다툼, 우주의 법칙은 상황을 귀찮고 지겹게 만든다. 독자가 느끼는 지겨움도 N이 학교에서 겪는 지겨움과 다르지 않다. 겨우 식판 따위로 아웅다웅하는 학교 내의 갈등은 교육청의 개입에 시시하게 끝이 난다. 이런 알력에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던 N도 나중에는 지겹고 귀찮기만 하다. 그러한 귀찮음과 권태는 정확하지는 않아도 우주의 법칙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권태하는 인간은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고 결국엔 세계를 더욱 개판으로 만든다. N의 어머니는 욕창으로 고통받고 교실의 뒷문은 고쳐지지 않는다. 그런 법칙에 일단 항복할 뻔한 N은 연장된 한 달의 기간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면 부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놀랍게도 마지막 순간에 반전한다. N은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는 세계에 저항하기로 한다. 말을 잃고, 죽어가며 점점 존엄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인간으로 여기고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그녀의 말처럼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모든 것이 개판이 되어가는 우주의 법칙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인간을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인간이 수단으로 다뤄지지 않을 때 인간은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다. <손톱>의 비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권여선의 여러 소설은 우주의 법칙에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송추의 가을>의 막내아들은 수단으로 다뤄지는 어머니의 죽음에 분노하고, <모르는 영역>에서는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부녀의 모습은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소통의 방법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점점 나빠지는 우주의 법칙에 저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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