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 「임철우」 - 사평역, 눈이 오면, 붉은 방 사피엔스 한국문학 중.단편소설 20
임철우 지음, 권일경 엮음 / 사피엔스21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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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우 <사평역>을 읽고

 

이따금 몇몇 문장들은 한 독자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고는 한다. 그 충격은 기억에 새겨져 누군가의 감정을 더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때로는 새로운 예술의 원료가 되고는 한다. 그렇게 새로 탄생한 예술은 때로는 티가 날 때고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적어도 임철우의 <사평역>이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이라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사평역에서>의 첫 문장이자 이 소설의 첫 문장이기도한 이 문장은 이 소설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다. 철저하게 시의 장면과 감정의 재현을 목적으로 한 이 소설의 문장은 먼저 쓰여 진 시의 분위기를 충실히 산문화시키고 있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열차는 몇 시간째 연착하고 있다. 간이역의 역사에는 톱밥난로가 불타고 눈발을 해치고 간이역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지친기색으로 난로의 온기에 몸을 데운다. 병든 노부와 그를 데리고 병원에 가려는 농부, 가족의 기대를 등에 없고 대학에 들어갔지만, 정학을 당한 대학생과 서울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중녀부인, 서울에서 물장사를 하면서 대학생들을 부러워하는 젊은 여인 등의 사람들이 차례로 간이역에 들어온다.


간이역에 들어오는 인물들은 각각에 사연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겪은 사연은 열차를 타고 온 세계. 즉 농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정류장이라고 할 수 있는 간이역은 그들이 자신들의 사연을 갈무리하는 공간이다. 끝없이 내리는 눈 때문에 기차는 한없이 연착하고 따뜻한 온기는 간이역의 승객들을 보듬어준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그 장면은 곽재구 시인의 시구를 그대로 재현하는 장면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은 인생이 그러하듯이 명확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의 사연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학생의 삶이다. 농촌의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서 공부를 잘해 집안의 희망이 된, 그 시대에 전형적인 학생의 모습이기도한 그는 자신의 양심을 따르다가 결국에는 학교에서 제적당하게 된다. 그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양심을 따랐을 뿐임에도 그는 인생의 어두운 시기를 보내야한다. 차마 집에는 제적당했다는 말을 하지 못했기에 간이역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돌아갈 곳마저도 없다. 그가 갈 곳은 어디인가. 그곳이 죽음의 세상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곽재구의 시 속에 녹아있는 고즈넉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해낸다. 운문의 시를 산문화 하는 것은 언뜻 쉬어보이지만, 시에서 만들어진 몇 문장의 분위기를 몇 배로 늘리는 것은 소양이 낮은 나로서도 힘들게 느껴진다. 그러나 임철우 작가는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무엇보다도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에서 명확한 결말을 지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그들은 간이역에서 자신의 삶을 잠시 뒤척일 뿐이다. 마치 열차가 서지 않고 지나가는 간이역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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