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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내게는 하루키를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응. 하루키 재밌지.라고 그를 좋아하지는 않은 척 딴청을 피우는 시기가 있었다. 책을 읽는 것에 허영심을 가졌던 시기였는 데 한마디로 남들이 다 좋아하니 나는 웬지 좋다고 말하면 내가 뻔하게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요즘 말로 하면 힙스터 기질이나 홍대병이라고 표현할만한 심리 상태였다.
모두가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때였다. <상실의 시대>나 <1Q84>같은 장편 소설이 서점의 베스트 셀러로 팔리고 있었고, 그가 쓴 사소한 단편이나 장편들이 빠짐없이 번역되어 소개되어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은 책을 좀 읽는다는 사람들은 삐죽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 너도 뻔한 취향을 가졌군.’하고 속으로 생각했고. 책에 취미를 가지지 않는 사람은 다들 읽으니 한번 읽어보자는 느낌으로 그의 책을 골랐다. 하루키는 지금도 베스트 샐러 작가이지만 그때는 더 했다. 지금이 2024년을 하루 앞둔 2023년의 12월 31일이니 한 10년 전쯤 되었다. 나는 20대 초반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우울하기만 했던 10대의 여진을 온몸으로 받고 있을 때였다.
삶은 우울했고 나는 모자라기만 한 인간이라 제대로 된 사람조차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 시기였다. 스스로를 꾸미지도, 허세마저도 부리지 못하던 때였다. 청춘을 즐기라고 하는데 내게는 그런 청춘을 즐길 기회마저도 없는 듯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우울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매 순간이 늪으로 빠지는 것처럼 어두컴컴하기만 하다. 뭘 하고 싶기는 했는데 뭘 할지는 몰랐다. 뭘 할지도 모르는 채 그 나이 남자들이 다 그렇듯이 떠밀리듯 군대에 입대했고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다.
왜 하루키의 소설을 군대에서 읽기 시작했느냐고 묻는다면 그의 소설이 베스트 샐러였고 군인 선임이나 부대 내의 진중문고에서는 베스트 셀러 위주로 책을 들여놓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하루키의 책이 부대 내에서 돌아다니게 되었다. 내가 그때 읽은 책이 <상실의 시대>였다. 이제는 원제에 충실한 <노르웨이 숲>이라는 제목으로도 재발간하기도 했지만, 내게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에 더울 어울린다. 그 시기에 나는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인 와타나베의 고민과 그가 겪은 상실에 내 이유 없는 우울감을 동일시했던 것 같았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우울과 상실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우울감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그 나이 대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그런 통과의례였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리뷰를 쓰면서 왜 <상실의 시대>를 읽는 이야기를 하느냐면 이 소설을 읽으며 <상실의 시대>를 그 소설을 읽는 나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1부는 ‘나’가 15살에 만난 한 ‘소녀’와의 만남과 갑작스러운 이별을 그려나가며 동시에 소녀가 상상한 ‘도시’에서의 생활을 교차로 그려나간다. 도시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림자를 맡기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홀로 남겨진 그림자는 서서히 시들어가듯이 죽어 나간다. 도시 안에서 사람들은 소박하지만 성실한 생활을 이어나간다. 거기에서 나는 오래전에 헤어진 소녀를 발견한다.
어쩐지 이런 이야기라면 도시 안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하고 소녀를 데리고 탈출해야 할 것 같지만 하루키는 그렇게 이야기를 진행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오가면서 소설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이어나간다. 솔직히 2부가 이런 내용으로 이어질지는 상상도 못 했다. <1Q84>에서는 덴고와 아오마메가 재회라도 했지. 이 소설은 알 수 없는 곳으로 독자를 이끈다. 그리고 하루키의 글을 읽는 사람이 마땅히 그러하듯이 그 이끌림은 굉장히 즐겁다. 나이 들어서 보니 하루키가 정말 소설을 잘 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극적이거나 시끄러운 사건 없이도 독자가 700페이지 넘는 책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의 소녀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 <1Q84>에서의 아오마메처럼. 그의 다른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100퍼센트의 그녀가 등장한다. 그 여성들은 말하자면 주인공들의 ‘이데아’같은 존재이다. 그녀와의 만남이 실패했기에 주인공들의 인생은 순항할 기회를 영원히 잃는다.
충분히 재미있고 잘 읽히는 소설이지만, 하루키의 소설들이 그러하듯이 작가 자신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꽁꽁 숨겨 놓는다. 신나게 달려나갔는데 뒤돌아보니 복잡한 미로가 놓여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읽는 이들은 각자의 관점이나 생각에 맞춰서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는다. 2024년을 하루 앞둔 나에게 10년 전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파는 물러갔지만, 밤이 되니깐 날씨는 다소 쌀쌀해졌다. 날이 포근해지는 날이면 미세먼지가 잔뜩 끼고는 했는데, 어제 내린 비 덕분에 공기는 맑고 바람은 깨끗하기만 하다. 10년 전의 나도 맑은 바람을 좋아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몸을 지니고 있음에도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 어느덧 과거를 잘 떠올리지 않고는 하는데, 오래간만에 그 시절을 떠올렸다. 문득 소설 속의 그림자처럼 말 잘하고 웃긴 그림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