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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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예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처음봤을 때. 그의 영화감독으로서의 데뷔작인 환상의 빛을 봤었다. 그 영화에 대한 감상평은 한 마디로 지루하다였다. 영상미는 뛰어났지만 영화의 연출적인 면을 보지 못하는 내 입장에서는 반복되는 파도소리와 굴곡 없는 스토리의 전개는 지루한 영화 그 자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영화를 다 본 게 용할 정도였다. 나중에 원작 소설을 읽고 나서야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이 영화를 얼마나 잘 만든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원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는 원작을 넘기는 힘든데. 환상의 빛 같은 경우는 소설의 맛을 살리고도 감독의 감각을 추가한 더 뛰어난 작품이었다.


환상의 빛이 뛰어난 작품인건 알겠지만 재미없는 건 어쩔 수 없었기에 그의 작품에는 그다지 손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막 개봉한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인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고 그의 팬이 되었다. 이 영화도 환상의 빛처럼 갈등이 거의 없는 잔잔한 영화였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분위기에 반해버렸다.

 

이 책은 히로카즈 감독이 2011년부터 신문에 연재하던 에세이를 모아놓은 글이다. 그래서일지 글 한편 한편의 분량은 짧다. 사이즈가 작은 책임에도 1장 반 정도면 글 한편을 읽을 수 있을 정도다. 글의 주제는 감독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바나 평소의 일상이 어떻게 영화에 영향을 미치는가. 자신이 영화를 찍으면서 있었던 즐거운 에피소드, 만났던 사람들(배우나 감독들),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등. 다양하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주제도 결국은 영화로 귀결된다.


히로카즈 감독의 팬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그의 작품세계와 생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더해서 그의 최신작인 태풍이 지나가고를 봤다면, 어린 시절을 묘사하는 그의 글에서 영화에서 본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예를 들자면, 에세이 중 한편에서 어린 시절 칼피스를 얼려먹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 묘사를 읽는 순간 영화에서 아베 히로시씨와 키키 키린여사가 얼린 칼피스를 수저로 긁는 장면이 떠올랐다.


JTBC 뉴스룸에서 히로카즈 감독이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곳 개봉할 신작을 홍보하기 위해서 출연한 것인데 거기서 감독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연립 공단을 상상하며 로케이션 장소를 찾다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연립 공단에서 촬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책에서 묘사 된 연립공단의 모습은 내가 영화에서 먼저 본 그 장소라는 얘기다. 영화를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히로카즈 감독을 거장이라고 말하기는 어째서인지 민망하다. 그렇다고 그를 그저 괜찮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예술을 아는 감독이고 영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감독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그를 이해하기에 도움을 준다. 히로카즈 감독을 모르는 사람도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 읽는 다면 더 재미있을 책이다.


창작자가 자신의 경험을 어떤 식으로 자신의 창작물에 녹여낼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조금은 알 수 있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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