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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에는 독서 하는 데 권태기가 온 것 같았다. 웬만한 책들은 고만고만하게 느껴졌고 의무감에 하는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예전에 즐겁게 읽었던 책을 읽었는데 그 책도 별로였다. 그러다가 김금희 작가의 신작 소설집인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를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그 책들이 재미가 없었던 것이었구나. 이 책을 읽을 때는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갈 때였는데 나를 담당하는 디자이너님이 예약을 2중으로 잡아놓으시는 실수를 해 예상보다 더 오래 걸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책을 읽고 있어서 기다리는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취한다는 느낌이 든 건 오랜만이었다. 좋은 책을 읽으면 컨디션이 좋아진다. 이 책을 읽을 때 그랬다.
최근에 여러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보면 작가들이 자기 얘기를 한다는 착각에 빠지고는 한다. 그 소설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인물들이 이름과 상황만이 바뀌어 다른 소설에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많은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틀에 박힌 듯이 비슷했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김금희 작가의 소설이 세계나 마음에 관한 서술을 넘어서 소설 속 개개인을 형상화하고 그들 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한 소설가에 의해서 쓰인 소설은 아무리 소설 각각이 떨어지고 각각의 상황이 다르더라고 공통된 형질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소설집 속의 소설들은 물론 김금희 작가의 여러 특징들이 드러나지만 그를 너머서 소설 속 등장인물 개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각자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은 재수를 하며 우연히 의대생에 입학한 친구였던 ‘장의사’와의 재회와 그를 매개로 한 의대생인 ‘김조교’와의 만남으로 파생된 여러 감정과 사건들에 대해서 묘사한다. 소설을 읽으며 느낀 것은 사건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의사와 만난 나는 담담하게 만나며 어떤 우정 같은 것을 쌓는데 이 관계성은 친구의 우정이나 남녀 사이의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이러한 정의될 수 없는 감정은 일종의 애도의 순간이기도 하고, 안타까움, 방황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을 품은 시선으로 술회된다.
장의사와의 만남은 곧이어 김조교와 얽힘으로 이어지고 나는 김조교와의 짧은 만남 뒤에 그의 열렬한 구애 끝에 사귀다가 금방 헤어진다. 소설에서 김조교는 나와 장의사에게 가스라이팅을 반복하는 이로 그려지지만 그럼에도 명백한 악인으로는 그려지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보면 김금희 작가다운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소설 속 사건들은 인과관계와 연결성이 모호하게 처리되며 우리는 그래서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긴 그렇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해서 명확한 해석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표면적으로는 아주 단순해 보이는 사건도 그 이전에는 함부러 정의 될 수 없는 다양한 원인과 결과의 얽힘이 표면으로 잠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 속에 도출되는 서사의 결과는 마치 우리 인생의 진실이 그러하다는 듯이 여겨지는 듯이 모든 사건의 원인을 내심 짐작할 수밖에 만든다.
<마지막 이기성>은 예전에 다른 소설집에서 본 소설이었다. 일본 유학생이 이제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나’는 학생 시절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묻은 타임머신을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일본으로 향한다. 나의 머릿속에는 일본 유학 시절 여자친구였던 유키코에 대해서 회상한다. 김금희 작가다운 연애 후 회고담 형식의 소설로 <너무 한낮의 연애>도 이와 비슷한 구성과 감정 감성을 건드린다. 이기성과 유키코의 희안한 만남은 결국 인생이 다 그렇듯이 엇갈리지만,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닌 나를 바꾸는 하나의 재료가 되어 감정을 휩싸인다. 예전에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이 끝나며 두 사람이 재회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했었다. 김금희 작가의 그러한 감정과 마음이 잘 드러나는 소설이었다.
소설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중견작가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는 김금희 작가의 모습이 노력이 담긴 소설집이었다. 왜 이렇게 더 재미있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살면서 많은 책을 읽으며 때로는 의무감으로 책을 읽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그런 의무감이 하나의 권태로 이어진 것 같았다. 이 책은 내가 왜 책을 읽는지를 다시 상기시켜주는 그런 소설이었다. 다시 신작을 내주세요.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