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가을 2021 소설 보다
구소현.권혜영.이주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매 계절 소설보다 시리즈를 발간한 게 몇 년이나 되었던가 삼 년인가 사 년 정도 되었을 것이다. 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서 좋아하던 게 어제 같다. 이 책이 차지하는 책장의 면적이 한 칸을 차지해간다.

 

이번 소설보다 2021:가을의 경우에도 매번 마찬가지로 3명의 작가가 소개되었다. 구보현, 권해영은 처음 접하는 작가들이고 이주란 작가는 다른 소설수상작이나 그 이전에 소설집도 발간한 작가였기에 익숙한 작가이다. 저번 2021:여름의 경우에는 수록된 소설들의 분량이 꽤 길어서 꽤 두꺼운 편이었는데 이번 경우에는 꽤 얇다. 분량에 대한 불만은 거의 없는 사람이라 길면 오래 볼 수 있어서 좋아하고, 짧으면 가볍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아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읽는 편이다.

 

첫 번째 수록작인 구소현 작가의 <시트론 호러>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데로 호러틱한 분위기가 풍기는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인 공선은 오래전에 아사한 후 유령이 되었다. 유령은 여러 대중매체의 상상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존재다. 유령의 무력함을 묘사하는 부분에는 <보건교사 안은영>의 한 장면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 소설, 드라마에서는 유령이 정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어서 아이패드로 놀 수 있다.) 공선은 무엇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지루함만은 강렬하게 느낀다.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취미를 가지지만 최종적으로 정착한 취미는 독서다. 공선은 대형 서점에서 서서 책을 읽는 이들 중에 자신과 호흡이 맞는 이들을 찾아서 헤맨다.

이 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던 점은 첫 장면과 끝 장면이 이어지는 수미상관 구조다. 유령의 시점에서 독서가 가지는 의미를 묘사하는 장면은 특유의 핍진성이 느껴져서 굉장히 재미있었다. 이러한 디테일이 이 소설의 세계에 몰입하게 해주었다.

소설보다 시리즈는 소설 본문 뒤에 작가와의 인터뷰가 실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의 소설 세계관이나 근황 같은 것을 알 수 있는데 구소현 작가의 <시트론 호러>를 작가는 가장 발랄하게 쓴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발랄한 면이 있었지만, 시체가 나오고 주인공인 공선은 밥을 먹지 못했다... 발랄... 하긴... 하다... 아무튼, 작가의 다음 작품이 읽고 싶게 하는 소설이었다. 건필하시길.

 

권혜영 작가의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는 어느 날 갑자기 아파트 계단에 갇힌 사람들에 관한 얘기다. 아래로 내려가도 출구가 없으며, 위로 올라가도 펼쳐지는 건 무한한 계단이다. 인간은 무한한 풍경에 경외감과 동시에 공포를 느낀다. 광막한 파도와 초원, 사막으로 과거에 걸음을 옮기는 이들을 탐험가라 불리며 동경하던 것은 인간은 끝도 없이 펼쳐진 것들에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펼쳐지는 기현상의 원인을 추측하는 것도 흥미롭다. 사건의 원인은 인간 인생의 은유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삶에 대한 공포, 허무를 가리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의미, 메시지를 추측하기보다는 단순히 기현상 속에서 절망하는 인간의 모습만으로 이 소설을 읽을 의미는 충분하다. 이 소설은 절망에 대한 소설이고 내가 이런일을 겪으면 당장 자살해야지 하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무서운 공포소설이었다.

 

이주란 작가의 <위해>는 위의 두 소설과는 완전하게 결이 다른 소설이다. 위의 두 소설이 소재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새로운 형식의 소설들이라면, 이주란 작가의 <위해>는 전통적으로 순문학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본다. 이주란 작가의 소설들은 이전에도 봐왔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안정되고, 차분한 소설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불행의 언저리에서 살아가지만, 그것을 불평하지도 않고, 묵묵히 살아나간다. 이주란 작가의 인물들은 언제나 무뚝뚝하며 격정적이지 않다. 조용하고 다정한 사람들. 실제로 만나도 별다른 인상을 받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진다. 나는 소설이 끝나고 등장인물들이 살아갈 날들을 그려나간다. 아마 소설에서 묘사한 것도 같이 살아갈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오늘은 11/30이다. 비 온 뒤 날씨는 추워졌고 한달뒤면 새해가 된다. 다음 책에는 어떤 소설들이 실릴까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