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를 의심한다 서해역사책방 2
강만길 외 지음 / 서해문집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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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사는 과거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는 눈과도 직결된다. 현재 가지고 있는 성향이 어떠한가에 따라 과거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도 달라진다. 보수와 진보, 각기 상대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두 축에 속한 이들이 각각 지난 군사 정권을 달리 해석하듯. 우리의 역사는 어쩌면 참으로 경직되어 왔던 것 같다. 여느 나라나 자국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축소하고픈 욕구를 지니고는 있겠지만, 문학도 그렇고 역사도 그렇고 단 한가지 길만을 ‘진리’로 열어놓고 모든 이들에게 그 길을 강요했던 우리의 교육은 다음 세대가 지닐 수 있는 모든 창의력을 고갈시켜 버렸다. 한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권위주의와 권력 지향적 사고는 어쩌면 그러한 교육으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진 않는 것이 지난 날이다. 있는 그대로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현재의 우리를 발견하는 것이 역사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의 변화와 함께 역사 교육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본인이 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통일신라 라는 단어보다는 남북국 시대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북쪽의 변방 국가 마냥 받아들여지던 발해를 우리의 것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진보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많은 부분은 여전히 우리에게 난해함으로 다가온다. 특히 제도권 교육에 익숙한 나머지 그 외의 길을 생각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 정도가 더 심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와 같은 난해함은 우리 역사의 시초로 일컬어지고 있는 단군을 둘러싼 논쟁에서부터 비롯된다. 단순한 신화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진정 사실로써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같은 사실을 두고 친일파와 민족주의 진영 사이에서 교묘하게 사용되었던 단군에 대한 고찰로부터 이 책은 시작한다. 임나일본부의 경우, 일본의 극우주의적 흐름이 그 농도가 짙어짐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역사에 대한 왜곡과 동시에 지난 날 동아시아 지배 자체를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그에 대해 감정적인 대응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실질적인 주체였던 가야 제국은 배제한 체 ‘임나’에 대해 논했던 지금까지의 지루지리함은 탈피해야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다시 해석되고 있는 광해군에 대해, 그가 왜 왕으로부터 물러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 역시 돋보이고 있다. 왕위 계승에 있어서의 정당성 결여와 시대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명과 후금 사이에서의 중립외교 그리고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한 무리한 중건 속에서 그의 정치는 빛을 바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소수파였던 북인의 실패이기도 했으며, 노론 중심의 질서 재편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이 책은 지난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물산장려운동, 105인 사건 등 우리의 역사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사건들을 다시금 해석하고 있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냉전 상태에 고착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특수한 남북단절의 상황은 모든 것을 뒤로 제쳐놓은 체 국방의 필요성을 과대 포장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었으며, 그 안에서 평화와 진보, 민주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기에 우리 사회에서의 진보는 성취되기 힘들었고 사상에 있어서의 풍요 역시도 제한되었다. 수많은 친일 행각들이 민족적 행위로 묘사되고, 평화를 지향하는 행위들이 체제 전복을 꿈꾸는 위협으로 비화되는 가운데 우리는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역사를 쓰고 있다. 지난 역사에 대한 해석은 현재의 역사를 쓰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시대는 변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닮은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 경직된 사회에 새로운 변혁의 힘을 불어넣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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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문학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34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박상진 옮김 / 책세상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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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에는 이탈리아 대중 문학의 부재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독자들이 이탈리아 작가의 글이 아닌 프랑스 등의 다른 나라 작가의 글을 즐겨 읽는 현실에 대하여 그는 당시 이탈리아 작가들의 엘리트 의식을 그 이유로 꼽고 있다. 스스로를 국민의 교육자로 여기는 작가들의 태도 속에는 대중의 욕구에 대한 고려가 존재치 않았고 이는 작가로 하여금 대중과 연대 의식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렇게 작가는 대중의 욕구와 괴리된 작품들을 만들어냈으며 하나의 특권층이 되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써나간 글에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개성이 부재하였다. 그람시는 예술성과 동시에 대중성을 겸비한 무언가를 바랬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문학은 문명의 실제 요소인 동시에 예술 작품이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 작가들은 그러한 창조성을 갖추지 못했었다. 오히려 그들은 프랑스 역사 소설을 읽고 자란 이탈리아 대중의 취향에 맞추어 이탈리아 외에서 소설의 주제를 찾았다. 지독한 상업성의 추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탈리아 작가의 소설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할 수 없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소설들은 민주주의 이념과 동시에 소 부르주아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탈리아의 작가들은 헤게모니 장악 욕구, 즉 부르주아로서의 작가가 프롤레타리아인 대중 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를 잃고 싶어하지 않는 욕구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작가 만초니를 통해 부르주아로서의 작가를 엿보았다. 그에 따르면 만초니의 대중을 바라보는 시각은 조롱이었고 동정이었다. 그것은 귀족적인 카톨릭주의의 시각이었으며 대중을 단지 자선의 대상으로 보는 특권층의 시각이기도 하였다.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대중 교육의 의도를 가진 문학이 대중의 정신적 관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 문학의 비 대중성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이는 유럽의 다른 국가가 국민화의 현상을 경험했던 것에 반해 이탈리아만큼은 유럽적 시각을 고수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특성은 문학의 종류에 있어서도 회고록이나 평전, 자서전 등에 대해 무관심한 이탈리아 작가들의 성향으로 이어졌다. 즉, 살아있는 현실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 속에서 이탈리아 문학은 현실로부터, 대중으로부터 괴리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역사 속에서 이탈리아가 가장 화려한 모습을 간직했던 순간 중 하나인 ‘르네상스 시기’에 대해서도 부정한다. 그람시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진실된 의미의 문화적 부흥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궁정의 자기 과시적 예술 장려 정책 속에서 양성된 거짓 문화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듯 역사 속에서 이탈리아는 대중과 지속적으로 괴리되어 왔으며 그로 인해 그람시의 시대에 대중들은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의식의 형성에 실패하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 역시도 그람시가 살았던 이탈리아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나부터가 우리 나라 작가의 소설 보다는 외국 작가의 소설을 읽고 그 안에서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나는 이문열 님의 글에서 보수 반동을 느끼고 신경숙 님의 글에서 현실 도피를 엿본다. 교묘하게 한국 사회의 진실을 외면하는 작가들의 글 속에는 우리 자신의 것이 존재치 않는다. 작가들에게 존재하는 대중적 온정주의나 귀족주의는 그들의 작품을 순간적인 베스트셀러로 만들 수는 있으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스테디셀러로 만들지는 못한다. 동시에 작품을 읽는 우리 독자들에게는 그 안에서 우리의 본질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헤게모니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왜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지, 누구의 관점에서 어떠한 이야기를 풀어냈는지를 묻는 것은 어쩌면 책을 읽는 사람에게 요구되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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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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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군가는 현 시대 페미니즘에 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라는 평을 하기도 했지만, 나의 부족한 관점에서 보건데 이문열은 페미니즘에 대해 이해하기 보다는 무조건 배척하는, 기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남성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장씨 역시 여성의 지위를 이용해 같은 여성의 가치를 폄하하려 드는 작가상에 불과했다.

장씨의 이야기는 장씨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이문열의 페미니즘, 더 나아가 여성에 대한 혐오와도 같이 느껴졌다. 진정으로 괴로운 사람은 비명도 신음도 겨를이 없으나 괴로움을 견딜만 하면 그것을 내세워 무언가 얻고자 든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통적인 삶이 너무도 여성에게는 억압적이었지만 이제는 아주 많이 나아지지 않았냐며 페미니즘을 잠재우려 든다.

또한, 그는 남성의 존재를 통해 여성이 정체성을 획득하길 바라는 지독히 인습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여성의 삶은, 어설프게 쓰잘데기 없는 무능력 노동으로 사업하다 실패하고 그로 인해 아이들은 정서상의 혼란을 겪는 것 보다는 차라리 집안일을 하면서 남편과 자식에게 봉사하고, 자식들이 다 크고 나면 그 때 찾아오는, 아니 찾아오는게 아니라 자식들이 선사하는 여유를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어찌 여성에게 주어지는 기회의 차이라는 근본적 요소를 망각하고 수많은 남성들이 성공하는데 비해 여성은 그렇지 못하는 것이 여성의 능력부족이며, 가사에 맞게 규정지어진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단정짓는단 말인가. 여성이 가사일을 하는게 여성에게는 가장 효율적이라고 어떤 자료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가. 또한, 남편은 부모보다 더 오래 자신을 돌보아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권위를 인정해야만 하며,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여성 스스로의 아름다운 선택이라고, 어떤 이름으로 받아들이든 남편은 귀할 수 밖에 없노라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여성이라는 존재는 이미 없었다.

모든 투쟁은 지배층의 권력으로부터 비롯된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그에 저항하는 어떠한 힘도 표출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페미니즘은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라는 선행하는 사실이 존재했기에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흐름이었다.

또한, 페미니즘은 남성의 권위와 권력을 빼앗음으로써 여성 혼자만 잘 살아보겠노라는 반란이 절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여성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렇기에 여성에 대한 존중은 여성을 넘어선 남성과 여성, 인류에 대한 존중이라고 난 생각한다. 여성이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로만 존재해야 된다는 식의 억지 사고는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인권을 이야기하면서 왜 여성의 것은 이야기할 수 없단 말인가. 여성이 직장을 가지고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 역시, 남성이 직장을 가지고 남성이 가사일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하나의 ‘선택’으로서 받아들여질 순 없는 것인지. 그런 면에서 이문열은 ‘선택’의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여성들이 남성에게 복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양육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속에서 자기를 규정지은 것이 비록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건 진정한 의미의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며 그러한 선택은 절대적으로 옳을 수 없다.

여성이라고 모두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여성들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내세워 이야기하기에 앞서 자신의 삶을 여성으로서의 삶으로 가꾸어나가길 바란다. 그 과정은 남성들이 볼 땐 적대적일 수도 있으며, 콧대 높은 여성들의 못난 짓에 불과하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그것은 자신의 삶을 가장 가치있게 만들 수 있는 일이며, 스스로의 이름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강요된 가부장제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저항하자. 그것이 곧 여성을 위한 길이자 인류 모두를 위한 길이다. 그것이 곧 아름다운 저항이며, 또 하나의 변혁이고 진보임을 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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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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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상 사람들은 ‘정상/비정상’이라는 기준을 두고 모든 것을 평가한다. 전자에 속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누군가를 후자에 속한 존재로 만들고, 그렇게 후자가 되어버린 자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고, 결국에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정신병동은 그러한 기제가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공간이다. 누군가를 현실로부터 배제시키기 위한, 비록 중간에 피넬 박사에 의한 패러다임 전환의 과정을 겪었고 오늘날에는 지역사회에 기반한 모델이 주를 이루고 있는 듯 하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형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베로니카의 삶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그녀는 이 땅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쾌락과 즐거움을 자신이 겪었다고 자부했다. 이후에 다가오는 삶은 반복의 연속일 뿐이었다. 변화라곤 찾아볼 수 없을 그 평탄함이 그녀는 괴로웠다. 부모님의 말을 따라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도서관 사서라는,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직업이 전부였다. 더 나아질 것이라곤 조금도 없는 것 같은 이 시점에서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죽음을 결심하는 것뿐.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만큼 영예로운 것도 없으리라. 그녀는 수면제 과다 복용이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덜 폐를 끼칠 수 있을 것 같은 방법을 택했고, 자신의 조국 슬로베니아를 알리는 글을 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생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육체를 이탈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아니었다. 굵은 튜브와 의료 기기들에 의지한 자신의 모습은 실패자의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젊고 예뻤으며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부터 그녀의 이름은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빌레트. 그 이름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공포감을 일으킬 수 있는, 이미 오래전 사라졌어야 하는 전기치료도 감행되고 있다는 그곳에 이제 그녀는 누워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심장은 앞으로 그녀에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반쯤 성공한 죽음이라고 할까? 그것은 벗어나고 싶은 형태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머지않아 어차피 죽게 된, 그런 인생을 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젊음은 그녀에게 많은 가능성이 존재함을 의미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분명 자살시도를 했지만 정신병원에 갇힐 만큼 미치진 않았다. 그랬기에 그녀는 두려웠다. 모두가 미쳐있는 그 공간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미친 척 하는 것이 최선의 방침임을, 그리고 그녀에게 남아있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은 그녀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발견했다. 빌레트를 안락하게 여기고 미친 척 하며 살아가고 있는 ‘형제 클럽’ 사람들이 있음을. 미쳤다고 일컬어지는 이들에게도 각자 나름대로의 삶이 있으며,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때부터 그녀는 살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마음 속 가득 찼던 근원 모를 분노를 피아노 선율과 함께 쏟아내 버린 어느 날, 그 밤마다 자기 음악의 유일한 청중으로 존재하는 에뒤아르와의 교감 속에서, 그녀는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에뒤아르는, 단 한마디의 말도 내뱉지 못하는 정신분열증 환자인 것이다. 그녀에게 살아야겠다는 이유를 불러 일으킨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싹트고 있던 ‘사랑’의 존재를 그녀는 어쩌면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틀을 뛰어넘어 빌레트라는 하나의 작은 사회도 변화시키고 있었다. 죽기에는 너무 젊은, 하지만 죽음에 임박한 그녀의 삶은 제드카와 마리아에게 지금껏 존재치 않던 용기를 발산토록 만들었다. 그들은 베로니카를 통해 지금껏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팠지만 그럴 수 없게 만들었던 벽을 뛰어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이 편한 세상(빌레트)를 놔두고 혼란의 물결이 이는 보스니아로, 자신의 쓰임을 믿으며 떠나버린 마리아를 향해 ‘형제 클럽’ 사람들은 이제 그녀가 완전히 미쳤다고 말했지만, 정작 미친 건 그들이었음을 그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삶을 꿈꾸게 해준 존재 에뒤아르에게 ‘사랑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베로니카는 죽음의 향기를 뛰어넘어 기적적으로 허락된 또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영원히 기적일, 그 삶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주 오래전 나는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죽겠노라고 다짐을 했었다. 어린 마음에 바라보았던 20 이라는 숫자는 한 인간에게 갑작스레 너무도 많은 삶의 무게를 허락하는, 지나친 자유였고, 감당할 수 없는 무엇이었던 것이다. 2000년 새해가 밝는 그 순간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흉측한 소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그 때, 아이러니하게도 스무 살에 죽겠노라던 나는 “더 살고 싶다” 아니 “더 살아야만 한다”를 강렬히 외치고 있었다. 삶은 어쩌면 그런 것인가보다. 죽음을 결심하는 그 순간 비로소 내 눈에 맞는 안경을 끼고 세상의 다채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때 비로소 강렬히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되는 그 무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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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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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번이라도 내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었던가. 나에게 자아정체감을 확립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세상은 순간순간 나에게 한꺼번에 너무도 많은 것들을 강요해왔다. 10대 소녀이던 시절 나는 그 과정에서 뒤쳐지면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가슴이 저렸었다. 그런 내게 자아의 신화를 찾는다는 말은 끔찍히도 소름끼치는 표현으로 다가왔다. 금을 만든다는 연금술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호기심보다는 일종의 미신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기에 영혼을 가꾸는 연금술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랬다. 나는 그저 금이라는 반짝이는 물체가 지닌 경제적 가치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연금술에 대해 과학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 연금술사를 만나는 것엔 실패하는 영국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끼는 것들은 어쩌면 다소 현실적이고도 조잡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 깊이있는 바를 모두 읽어내지 못하는 내 무능력을 탓할 수 밖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산티아고, 그에게는 그만을 믿고 따르는 양들이 있었고 한없이 떠돌 수 있는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두 번의 꿈은 그의 미래를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갑자기 양떼를 팔고 여행자가 되어 이집트 피라미드에 있다는 보물을 찾아 떠난다. 그 과정 하나하나는 어쩌면 유혹이고 고통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가진 돈을 모두 도난당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나 자신의 갈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순간순간의 유혹은 너무도 컸기에 끊임없이 그는 되돌아가고 싶음을 고백해야만 했고, 금만드는 연금술을 가르쳐달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그는 아랍어를 배웠고 양떼에 갇혀있던 자기 자신을 보다 넓은 세상 속에서 해석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렇기에 그는 세상 곳곳에 널려있는 표지를 이해할 수 있었고, 자신의 삶을 가능케 하는 요소들에 눈뜰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 안에 잠들어있던 마음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바람을 움직여 사막을 휘날리게 할 수 있었고, 결국 바람이 될 수 있었다.

여전히 난 연금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무엇이다 라고 정의내려야 할진 잘 모르겠다. 연금술의 언어를 전혀 이해치 못할 뿐더러 흉내내려 한 적도 없는 내가 이 소설 하나로 연금술을 깨우쳤노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연금술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저자만의 독특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 연금술이라는 것이 이토록 깊이있는 학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연금술은 금이라는 반짝이는 고체를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조용히 바라보고 판단할 줄 아는 무언가였다. 마음이 이끄는대로 나아가고 결국엔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무언가였다. 산티아고, 그가 마지막에 얻은 금화가 가득 담긴 궤짝은 바로 자아가 아니었을까 한다. 지금껏 그의 삶을 가능케 했던 것, 그에게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산티아고 자신의 마음이었던게 아닐까 한다. 그런 보물이 나에게도 허락된다면, 아니, 이제부터 나도 그런 보물을 찾아 길을 떠나야겠다. 나를 위한 보물을 찾을 수 있는 존재는 나 자신 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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