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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1997년 3월
평점 :
절판
누군가는 현 시대 페미니즘에 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라는 평을 하기도 했지만, 나의 부족한 관점에서 보건데 이문열은 페미니즘에 대해 이해하기 보다는 무조건 배척하는, 기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남성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장씨 역시 여성의 지위를 이용해 같은 여성의 가치를 폄하하려 드는 작가상에 불과했다.
장씨의 이야기는 장씨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이문열의 페미니즘, 더 나아가 여성에 대한 혐오와도 같이 느껴졌다. 진정으로 괴로운 사람은 비명도 신음도 겨를이 없으나 괴로움을 견딜만 하면 그것을 내세워 무언가 얻고자 든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통적인 삶이 너무도 여성에게는 억압적이었지만 이제는 아주 많이 나아지지 않았냐며 페미니즘을 잠재우려 든다.
또한, 그는 남성의 존재를 통해 여성이 정체성을 획득하길 바라는 지독히 인습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여성의 삶은, 어설프게 쓰잘데기 없는 무능력 노동으로 사업하다 실패하고 그로 인해 아이들은 정서상의 혼란을 겪는 것 보다는 차라리 집안일을 하면서 남편과 자식에게 봉사하고, 자식들이 다 크고 나면 그 때 찾아오는, 아니 찾아오는게 아니라 자식들이 선사하는 여유를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어찌 여성에게 주어지는 기회의 차이라는 근본적 요소를 망각하고 수많은 남성들이 성공하는데 비해 여성은 그렇지 못하는 것이 여성의 능력부족이며, 가사에 맞게 규정지어진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단정짓는단 말인가. 여성이 가사일을 하는게 여성에게는 가장 효율적이라고 어떤 자료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가. 또한, 남편은 부모보다 더 오래 자신을 돌보아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권위를 인정해야만 하며,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여성 스스로의 아름다운 선택이라고, 어떤 이름으로 받아들이든 남편은 귀할 수 밖에 없노라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여성이라는 존재는 이미 없었다.
모든 투쟁은 지배층의 권력으로부터 비롯된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그에 저항하는 어떠한 힘도 표출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페미니즘은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라는 선행하는 사실이 존재했기에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흐름이었다.
또한, 페미니즘은 남성의 권위와 권력을 빼앗음으로써 여성 혼자만 잘 살아보겠노라는 반란이 절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여성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렇기에 여성에 대한 존중은 여성을 넘어선 남성과 여성, 인류에 대한 존중이라고 난 생각한다. 여성이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로만 존재해야 된다는 식의 억지 사고는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인권을 이야기하면서 왜 여성의 것은 이야기할 수 없단 말인가. 여성이 직장을 가지고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 역시, 남성이 직장을 가지고 남성이 가사일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하나의 ‘선택’으로서 받아들여질 순 없는 것인지. 그런 면에서 이문열은 ‘선택’의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여성들이 남성에게 복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양육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속에서 자기를 규정지은 것이 비록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건 진정한 의미의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며 그러한 선택은 절대적으로 옳을 수 없다.
여성이라고 모두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여성들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내세워 이야기하기에 앞서 자신의 삶을 여성으로서의 삶으로 가꾸어나가길 바란다. 그 과정은 남성들이 볼 땐 적대적일 수도 있으며, 콧대 높은 여성들의 못난 짓에 불과하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그것은 자신의 삶을 가장 가치있게 만들 수 있는 일이며, 스스로의 이름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강요된 가부장제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저항하자. 그것이 곧 여성을 위한 길이자 인류 모두를 위한 길이다. 그것이 곧 아름다운 저항이며, 또 하나의 변혁이고 진보임을 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