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선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1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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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인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로 많은 이들은 카를 마르크스를 언급한다. 그의 사상은 단순히 이론적인 측면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를 단순한 철학자로 파악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소위 마르크시즘의 영향을 받고 자신들의 투쟁을 정당화시켰으며, 지난 군사 독재 권력 하에서 그의 저서는 금서로 여겨지기도 했다. 항상 이름만 들어오던 <공산당선언>을 읽기까지 왜 그리도 망설였던건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대학교 1학년 때 뭣 모르고 집어들었던 <자본론>이 너무 어려워 고생했던 경험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언’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걸 간과했던 것 같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익히 들어보았을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최근에 인터넷에선 솔로 부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공산당 선언의 변형이 떠돌기도 했다-_-;;)로 시작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로 끝을 맺는 공산당 선언은 참으로 명료한 문체로 쓰여졌다. 프롤레타리아들의 단결을 부르짖는 글이니 굳이 학문적 용어를 써가면서 어렵게 서술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마르크스의 예언(?)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특히 그가 살았던 시대의 독일 사회는 혁명을 앞두고 긴박함이 넘쳐나고 있었다. 계급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양극화되고, 혁명 의식을 획득한 프롤레타리아들의 혁명, 투쟁에 의해 인류는 해방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 속에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역사는 그의 핑크빛 희망을 무너뜨렸다. 노동자들의 단결 아닌 상층 엘리트에 의한 혁명을 경험한 러시아는 한 국가에서의 혁명만으로는 전 세계의 자본주의 질서 붕괴가 불가능하다는 마르크스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동유럽 국가들을 폭력으로 점령했다. 그것은 공산주의가 아닌 국가 전체주의였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인간관계가 금전에 의해 맺어진다는 점에 주목했지만 남성과 여성을 바라볼 땐 가부장제라는 또 다른 질서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망각했던 것 같다. 자본의 유무 라는 너무도 단순한 기준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한 것이 그의 한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질서만의 독주가 계속되고 있다. 몇몇 공산주의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국가들의 경우 군사력으로 무장을 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전 세계에 팽배해있는 자본주의 세력을 붕괴할 정도로 강력하다고 볼 순 없다. 계급 질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공고해지고 있지만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획득하는 일이 일어나긴 힘들 듯 하다. 부자와 빈자로 전 세계의 인구가 양극화되고 있긴 하지만 화이트 칼라들의 경우 자신을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높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마르크시즘을 죽은 사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견제할 수 있는 어떠한 사상도 존재치 않는다는 사실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마르크시즘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마르크스의 예언이 실현되진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분명 자본주의 사회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움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공산당 선언에 이야기되고 있는 공산주의 사회의 많은 특징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실현되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자본가들이 자본주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변칙적으로 활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상교육제도나 몇몇 국가들에서 행해지고 있는 아동수당 지급 등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류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었으며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촉진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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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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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만 듣고는 고양이들을 소재로 한 하나의 소설일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하지만 웬걸, 역사였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주로 왕조나 국가의 지배층들의 것들에 초점을 두고 있는 역사와는 또 다른 의미의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최근 들어 각광 받고 있는 일반인들, 민중들의 생활상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가 다루고 있는 시대는 프랑스 사회의 신분제가 깨어지는 동시에 새로운 지배 구조가 다져지던 시대였다. 무엇보다도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고양이 대학살’이었다. 고양이 대학살 사건은 축소된 의미의 프랑스 혁명이었으며, 그 자체로서 프랑스 혁명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비록 그 당시를 살아가던 이들은 프랑스 혁명의 가능성에 눈뜨지 못했지만, 그 시대는 직인들은 장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잃었으며, 자신들의 노동이 자기 자신을 소진시킨다는 사실에 눈을 뜨고 있었다. 수시로 이루어지는 고용과 해고 속에서 그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았으며, 신분제 자체에 대한 부조리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지배층에 대해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는 않는다. 냉소적인 태도로 지배 계층을 바라보지만, 신분제 자체를 비판하는 모습은 보이지 못한다. 그런 그들이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지배 계층을 상징하는 고양이를 통한 응징이었다. 당시 고양이는 마법, 마녀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이미지를 이용할 줄 알았다. 그들에게 고양이를 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닌 지배층이었다. 그리고 그 명령은 여주인이 아끼던 그리스에 대한 처형을 정당화시켜주는 일종의 역설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명령을 즐겼다. 그들은 고양이를 잡아들이면서 지배층을 잡아들이는 희열을 느꼈고, 고양이에 부여된 부정적 이미지를 지배층에 투영시켰다. 동시에 그들은 고양이를 재판에 회부하고 처형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을 속박하는 지배층에 대한 재판과 처형을 경험하였다. 그것은 대리만족이었으며, 신분제에 대한 (간접적인) 반항이었다.

그 외에도 이 책은 서로 다른 듯 하면서 연결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처음에 나와있는 ‘마더 구스 이야기의 의미’의 경우,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에 퍼져있는 농부들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전형적인 특징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 시대를 가장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갔을 이들에 대한 조명이라는 면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모든 이야기들에는 가장 기본적인 식생활에 대한 욕구 불만이 표출되어 있다. 그 시대에 팽배했던 가난은 그들에게 음식 이외의 욕구를 모두 거세시켜 버렸다. 그들의 소원은 모두 먹는 것에 고착되어 있다. 동시에 프로이트 학파 학자들에 의해 이야기되듯이, 그 안에는 ‘성’을 둘러싼 논쟁들이 살아있다. 그것은 어쩌면 지배층의 입장에서 보았다면 저속하게 여겨질, 일종의 하층 문화일런지도 모른다.

‘한 부르주아는 그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의 경우, 프랑스 사회의 전통적 의미의 신분제가 무너지는 속에서 드러나는 지배층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한 경찰 수사관은 그의 명부를 분류한다’의 경우에는 감시, 수사의 차원에서 쓰여진 자료들에 저자가 숨결을 불어넣어 하나의 역사화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방면에서 프랑스 18세기의 역사를 살펴본 저자의 노력은 그 시대의 정치,경제, 사회적 요인으로부터 파생된 문화적 요인을 엿볼 수 있다는 아날 학파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한다. 동시에 저자는 역사는 과거의 한 영역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해석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아날 학파의 입장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독특한 관점에서 프랑스 사회를 꿰뚫는 역사적 진리를 바라본 이 책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 의해 새로이 해석되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해석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저자와의 조우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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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밭
신경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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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그녀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난 지난 날 한 선배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한다. 그녀의 글은 머릿속에서만 끊임없이 다듬어졌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진 모르겠지만 이 시대와 영혼을 울리지 못한다던 작가로서의 그녀의 역량에 대해 난 그다지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더 솔직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 책이 내가 읽는 그녀의 첫 번째 책이니 말이다. 실은 2000년에 이 책을 읽었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어느날. 그 땐 쉽게 읽힌다는 그 사실이 너무도 좋았다. 그녀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혹은 그렇지 못한 것들에 대해 바라보기에는 내가 너무도 어렸던 것이리라.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이 책을 찾게 된 이유가 무엇인진 잘 모르겠다. 침범해서는 안 되는 딸기밭을 내가 꿈꾸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꿈은 끊임없이 꾸는데 현실은 그 꿈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써내려간 문장들은 실로 아름답다. 때론 아무 의미 없이 내뱉는 것 같은 말 한 마디조차도 그녀는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그렇기에 읽는 이로서는 때론 알 수 없는 짜릿함을 느끼고, 때론 문장 마다 묻어나는 애절함과 서정성에 몸을 떨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 속에는 현실이 없다. 아니, 그녀는 수많은 갈등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삶은 갈등의 연속이고, 그녀는 그런 인간의 삶을 그려나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갈등들을 개인 안에 침잠시켜 버리는 방식을 해결책으로 선택했다. 사회와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 체 잘 다듬어진 문장 속에서 존재하는 이야기들은 지독히도 개인적으로만 발산된다. 그것은 사회와의 괴리이지만, 동시에 사회와의 어떤 갈등도 초래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조화이다. 그렇게 그녀는 간접적으로 사회가 살만한 곳임을 이야기한다.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는 잃은 아이를 통해 시작되는 갈등이 그 아이로 인해 해소됨을 보여준다. 아이의 죽음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냉각시켰지만 그 냉각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아이를 잊어보려고 부단히도 노력하던 두 사람은 서로의 결합만이 아이를 잊을 수 있는 방법임을 터득한다. 그리고 그 결합 속에서 죽은 아이가 보낸 선물을 받아들이게 된다. 두 인물은 갈등했지만 그들이 속한 사회, 그 틀을 깨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는다. 현실 유지 속에서 그녀는 행복을 발견할 뿐이다. 이어지는 이야기 딸기밭은 어떠한가? 다소 복잡한 구성의 이 이야기는 범죄형 남자와 라는 여인을 향한 욕망이 주를 이루고 있다. 두 종류의 욕망은 주인공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고, 그 강렬함은 너무도 커 그녀로선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일탈이었고 범해서는 안 되는 죄였다. 하지만 그녀의 욕망, 그 근원은 지독히도 개인적이었다. 흰 고무신이 그녀의 아버지를 연상시켰다는 사실이 이 소설에서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그녀는 숱한 데모대를 외면하고, 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 응답치 않음으로써 사회로부터 다시 한 번 괴리된다. 동시에 금지된 곳에는 다시 가지 않음으로써, 현실을 망각함으로써 마음 속에서 범했던 죄를 개인적인 것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이어지는 이야기들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가 모르는 장소의 경우, IMF 라는 시대 상황이 야기하는 문제들을 보여준다. 직장 내에서 위태로움을 경험하는 남성의 모습, 붕괴되는 가정의 모습까지. 하지만 주인공은 사회에 대한 어떠한 문제 제기도 하지 못한 체 호수에 뛰어드는 것으로서 현실 회피를 단행한다. 작별 인사의 경우, 이미 죽어 어느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는 M의 모습은 이 소설의 정서를 대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M의 죽음과 함께 시작하는 소설은, 그 시작 부분부터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 상태이다. M에게 허락된 것은 그저 자신을 향한 그리움이 끊이지 않길 기도하며 떠나는 것에 불과하다. M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건너편 아파트에서 자살을 감행하는 남성의 모습을 너무도 무기력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 모습은 그들에게 불안감을 불러 일으키지만, 그 불안감은 말 그대로 불안감일 뿐이다. 그는 언제 오는가 역시, 죽음을 앞둔 여동생의 저항은 지독히도 개인적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느 누구와의 공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비록 성공은 아니었지만 치열했다. 하지만 그녀를 파괴했던 것 역시 그녀의 치열함이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사회와 개인을 연결시키는 것은 하나의 딸기밭이었는지도 모른다. 범해서는 안 될 무언가. 그 무언가를 건드리지 않은 체 써내려가는 그녀의 글, 그 속엔 맑은 슬픔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글은 개인적 아픔을 사회 속에서 통찰할 기회를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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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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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라는 낯설음이 그에게는 익숙해질 법도 싶을 듯 하다. 그 사회 속에서 예전과는 다른 편안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돌아올 수 없는 나라 한국에 대해 그가 지니고 있는 생각은 무엇일지 묻게 된다. 한국사람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라 일컬어지는 ‘한’. 어쩌면 이 단어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을 제외한 모든 곳을 여행할 수 있는 자유, 그가 프랑스 땅에 발을 디디면서 소유하게 된 것들이다. 하지만 자유란 상대적인 개념일 것이다.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유일 수 없으리라. 70-80년대와 현재, 홍세화님에게 있어서 어쩌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는 너무도 솔직했고 용기있게 행동했다. 실제 그것은 그리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그만큼 거창하거나 위협적인 것이 아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였고, 대한민국 사회는 그 모든 것을 끌어안을 만큼의 관용을 지니지 못했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이데올로기와 숱한 의심으로 얼룩진 사회 속에서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구속을 행사하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시대는 끊임없는 열사와 투사들을 요구했고, 그는 독재와 이데올로기 전투 속에서 자성할 수 밖에 없었던 대학생이었다. 그는 짓밟히면서 살았다. 누군가가 이유없이 밟을 땐 그에 대항해야 된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죄였고,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그는 한국을 끊임없이 그리워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새로운 세계를 배우겠다는 그의 꿈은 새로움이 익숙함으로 변모해버린 지금까지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세상은 참으로 웃긴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애증’과도 같으리라. 자신을 버린 나라,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나라 한국은 결국 자신이 버릴 수 밖에 없는 나라로 변해버렸다.

‘망명자’라는 이름으로 그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어 있었다. 한 때 대학에 적을 두고 있기도 했지만, 새로운 사회는 그가 지니고 있는 대학을 졸업한 이로서 지닐 수 있는 단꿈을 모두 깨뜨려버렸다. 낡은 택시 한대에 모든 것을 걸고 그는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프랑스 사회,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다름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 치열한 논쟁이 존재하지만 그 속에 결코 미움은 존재치 않는 프랑스 사회의 신선함이 우리에게도 있었다면, 그랬더라면 우리의 현대사가 이토록 암울했을까.

너무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외면당해야 했고, 너무 간절히 바랬기 때문에 제거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의 선배들은 이제 현실에는 존재치 않는 과거 마냥, 책 속에서나 존재하는 슬픈 추억이 되어버린 듯한 인상을 받았다. 학부 통폐합과 신자유주의적 교육제도 속에서 지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해버린,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대학 사회는 이제 더 이상 홍세화님과 같은 아픔을 이해치 못하리라.

그가 사회를 치열하게 고민하던 지난 시절에 비해 지금의 한국사회는 많이 따스해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자신의 생각들을 정당화하기 바쁘다. 그것이 얼마나 극우적이며 얼마나 한 체제 편향적인지 알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도 질곡을 많이 겪은 듯 하다. 여전히 조금만 다르다는 이유로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히고,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활동들은 특별하고도 다가갈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 사회에 봄은 언제 올 것인지 오늘도 나는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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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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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아닌 열하일기 열풍이 불어닥쳤다. 베스트셀러로 등극해있는 한권의 책을 보면서 조금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온갖 치세술, 자기관리 서적들을 비집고 들어서 있는 인문학 서적. 때 아닌 단비를 만난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될까 아니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나 느낄 수 있는 환희라고 해야 될까. 비유가 너무 지나쳤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나는 오랜만에 유쾌한 책을 만난 이 기쁨을 표현하기에 나의 언어는 여전히 어딘가 모르게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다.

박지원,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실학과 함께 언급되는 그의 이름. 하지만 <허생전>, <호질> 등 몇몇 단편(?)을 제외하고 그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열하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능을 치루기 위해 고전 문학을 접하는 그 태도는 어떻게 보면 억지스러웠다. 글을 음미한다기 보다 그저 읽기 급급했고, 그 안에 풍만스레 녹아있는 유쾌함을 맛보기 보단 따분함에 취해야만 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열하일기>가 이토록 재미있는 글이었다는 사실을. 모 CF 에서 들어보았을 법한 한마디, 유쾌, 상쾌, 통쾌!. 이 세 단어가 그토록 잘 어울리는 글은 아마 찾기 힘들 듯 싶었다.

저자는 <열하일기> 하나를 다루고 있지 않다. 그녀는 박지원에 대해 심취하다 못해 흠모하고 있는 듯 했으며 그러다보니 한 권의 책 안에 너무도 많은 것을 쏟아붓는 무리를 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오히려 이 책을 만난 독자들의 행운이 이 한권의 책이 완성되어 나오던 그 순간 저자가 느꼈을 희열보다 더 큰 것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러한 인간이 만들어낸 문학 역시도 시대적 산물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열하일기>를 이해하기 위해 박지원이 살아간 시대를 알아야 하고 박지원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기본에 충실한 책이다. 거기에 들뢰즈를 비롯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까지 감상(?)할 수 있으니, <열하일기> 하나를 통해 우리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 조우하는 그 단면에 설 수 있는 유쾌한 경험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정조는 고문을 통해 성리학적 질서에 기반한 권력 정당화를 꿈꾼다. 단 한 번도 중앙의 핵심적 권력에 다가가지 않았던 박지원이었지만, 그런 그의 문체가 끊임없이 문체반정의 대상에 오를 수 밖에 없었으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간결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열하일기>의 문체는 온갖 수식어와 함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나긴 장문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 문장은 결코 조잡하다거나 구색 맞추기에 급급한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는 연암의 날카로운 관찰력이 살아 있고, 오늘날 연암의 글은 청나라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어주고 있다. 그의 눈은 지극히도 개방되어 있었고,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이런 그를 이단자로 취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유교에 입각한 사고를 펴고 있었지만 청나라의 발달된 과학기술 앞에서는 한없이 찬양할 줄 알았다. 그의 실용적인 관점은 우리나라의 온돌에 대한 비판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직접 벽돌을 제작이라도 해본 것인지, 그의 비판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매섭다. 실로 어마어마한 영역에 걸친 그의 학문적 역량에 나는 놀랄 뿐이었다. 거기에 흑백논리를 비껴난 중도의 묘미, 유쾌함으로 일관하는 묘사까지. 그의 글에는 태양인 박지원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더 이상 인문, 사회과학을 찾는 이가 없다며 많은 출판사들은 문을 닫거나 자신들의 주력 분야를 바꾸었다. 그런 시점에서 오히려 경쟁사가 없기 때문에 지금이 인문과학 서적에 주력할 때라고 당차게 말하는 출판사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인다. <열하일기>를 통해 발견한 유쾌함이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며 또 다른 인문과학에 눈을 돌리게 된다. 난해함을 뛰어넘은 유쾌함 앞에서 그렇게 나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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