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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프랑스라는 낯설음이 그에게는 익숙해질 법도 싶을 듯 하다. 그 사회 속에서 예전과는 다른 편안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돌아올 수 없는 나라 한국에 대해 그가 지니고 있는 생각은 무엇일지 묻게 된다. 한국사람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라 일컬어지는 ‘한’. 어쩌면 이 단어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을 제외한 모든 곳을 여행할 수 있는 자유, 그가 프랑스 땅에 발을 디디면서 소유하게 된 것들이다. 하지만 자유란 상대적인 개념일 것이다.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유일 수 없으리라. 70-80년대와 현재, 홍세화님에게 있어서 어쩌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는 너무도 솔직했고 용기있게 행동했다. 실제 그것은 그리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그만큼 거창하거나 위협적인 것이 아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였고, 대한민국 사회는 그 모든 것을 끌어안을 만큼의 관용을 지니지 못했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이데올로기와 숱한 의심으로 얼룩진 사회 속에서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구속을 행사하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시대는 끊임없는 열사와 투사들을 요구했고, 그는 독재와 이데올로기 전투 속에서 자성할 수 밖에 없었던 대학생이었다. 그는 짓밟히면서 살았다. 누군가가 이유없이 밟을 땐 그에 대항해야 된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죄였고,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그는 한국을 끊임없이 그리워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새로운 세계를 배우겠다는 그의 꿈은 새로움이 익숙함으로 변모해버린 지금까지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세상은 참으로 웃긴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애증’과도 같으리라. 자신을 버린 나라,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나라 한국은 결국 자신이 버릴 수 밖에 없는 나라로 변해버렸다.
‘망명자’라는 이름으로 그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어 있었다. 한 때 대학에 적을 두고 있기도 했지만, 새로운 사회는 그가 지니고 있는 대학을 졸업한 이로서 지닐 수 있는 단꿈을 모두 깨뜨려버렸다. 낡은 택시 한대에 모든 것을 걸고 그는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프랑스 사회,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다름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 치열한 논쟁이 존재하지만 그 속에 결코 미움은 존재치 않는 프랑스 사회의 신선함이 우리에게도 있었다면, 그랬더라면 우리의 현대사가 이토록 암울했을까.
너무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외면당해야 했고, 너무 간절히 바랬기 때문에 제거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의 선배들은 이제 현실에는 존재치 않는 과거 마냥, 책 속에서나 존재하는 슬픈 추억이 되어버린 듯한 인상을 받았다. 학부 통폐합과 신자유주의적 교육제도 속에서 지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해버린,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대학 사회는 이제 더 이상 홍세화님과 같은 아픔을 이해치 못하리라.
그가 사회를 치열하게 고민하던 지난 시절에 비해 지금의 한국사회는 많이 따스해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자신의 생각들을 정당화하기 바쁘다. 그것이 얼마나 극우적이며 얼마나 한 체제 편향적인지 알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도 질곡을 많이 겪은 듯 하다. 여전히 조금만 다르다는 이유로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히고,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활동들은 특별하고도 다가갈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 사회에 봄은 언제 올 것인지 오늘도 나는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