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의 집 1 - 큰 숲 속의 작은 집
로라 잉걸스 와일더 지음, 가스 윌리엄즈 그림, 김석희 옮김 / 비룡소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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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좋은 책을 발견하면 참 기쁘다. <초원의 집>은 내게 그런 발견의 기쁨을 준 책 가운데 하나다.

십여 년 전에 우연히 동네 헌책방에서 세계아동문학전집 가운데 몇 권을 샀는데, 그 가운데 <초원의 집>이라는 책이 있었다. 처음에는 사다놓고 잊고 있다가 어느 날 생각이 나서 읽기 시작했다. 아이들 동화책답지 않게 환상 이야기도 없고, 재미있는 사건도 없지만, 그러면서도 무언가 모르게 빨려드는 느낌에 계속 읽게 되었다.

옮긴이 해설을 보니, 이 책이 모두 여덟 권이라는데, 내가 구한 것은 두 권뿐이었다. 책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책방을 다녀 보았다. 시내 큰 서점에도 가보고 동네 서점도 샅샅이 찾아서 다른 출판사에서 낸 두 권을 더 구해서 읽었다. 알고 보니 <초원의 집>은 80년대에 두 군데 출판사에서 전집으로 펴낸 적도 있고, 여러 출판사에서도 한두 권씩 펴냈다. 틈틈이 헌책방을 뒤져 결국 짝이 맞지 않는 한 질을 다 구해 읽었다. 그러다가 몇 해 뒤에 청량리역 옆에 있는 헌책방에서 온전한 한 질을 구했을 땐 참 기뻤다.

기억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초원의 집>은 80년대 초반에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방영된 이야기다. 이 책을 쓴 로라 잉걸스 와일더는 예순다섯 살 때 딸의 권유를 받고 처음으로 자기 어린 시절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첫 번째 이야기 <큰 숲 속의 작은 집>은 다섯 살 때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여덟 번째 이야기 <눈부시게 행복한 시절>에서는 결혼하는 이야기로 끝맺는다. 그러니 지은이가 어릴 적부터 자라서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쓴 것이다.

로라의 아버지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숲 속에서 살고 싶어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 다닐 나이가 되면 마을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기로 다짐을 받고 숲 속으로 따라간다. 그렇게 해서 로라네 식구들은 집도 없고 길도 없고 사람도 없는 깊은 숲 속에서 살면서 마을에 살았다면 겪지 못했을 온갖 경험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로라에게는 자기가 본 것을 말로 묘사하여 전달하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된 것은 로라의 언니인 메리가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버지한테 언니의 눈이 되어 주라는 말을 듣고, 자기가 보는 것을 모두 언니한테 본 것을 그림 그리듯이 말해 주는 버릇을 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씌어진 이 책은 미국 개척 시대 농촌의 생활 모습을 바로 눈앞에 보듯 생생하게 그려 내어 보여 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3인칭 소설처럼 되어 있지만, 모두 실제로 겪은 이야기이고, 지어낸 이야기는 없다고 한다. 미국 아이들은 책을 읽을 나이가 되면 이 책을 읽으면서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며 자라나게 된다고 하니 성장 소설이라고도 할 만하다.

 이번에 미완성의 유고를 묶은 아홉 번째 이야기까지 보태어 아홉 권으로 나온 <초원의 집>을 다시 읽으면서, 우리에게도 우리 아이들이 읽으며 자라날 우리 농촌 이야기 책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예전에 정말 시골다운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 나라 작가들이 우리 아이들을 위해 아름답고 깨끗한 우리말을 살려 작품으로 남겨 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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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5
김형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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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통일’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누구일까? 어떤 사람은 장준하 선생을, 어떤 사람은 문익환 목사를 떠올릴 것 같다. 70년대 장준하의 죽음 뒤에 자진하여 ‘대타’로 나서서 이 땅의 민주와 통일 운동을 이끌어간 문익환 목사.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 이건 진담이라고” 하며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노래하다가 정말로 평양을 방문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

김형수 시인이 다섯 해 동안 충실한 답사와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기록한 835쪽의 두툼한 평전은 우리가 그동안 단편으로만 알고 있던 문익환 목사의 삶과 활동을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그려낸 역작이다.

1918년 망명의 땅 북간도에서 태어나 1994년 세상을 떠난 문익환 목사의 생애를 읽는 일은 그대로 우리 겨레의 독립운동사와 민주 통일 운동사를 읽는 일이 된다. 북간도의 명동 마을은 이동휘, 안중근 같은 독립투사들이 머물다 간 곳이다. 그래서 어머니 김신묵 여사는 틈만 나면 자식들에게 “문씨네 밥을 먹지 않은 독립운동가는 없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문익환은 교사가 되려다 생각을 바꿔 아버지 문재린 목사처럼 목회자가 될 공부를 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자의 손아귀에 동무인 윤동주 시인을 잃고 맞이한 해방 공간에서 문익환은 좌익과 우익의 대립을 몸으로 겪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한반도의 남녘에 정착한 문익환은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6·25 전쟁이 나자 유엔군 통역이 되어 휴전 협정의 현장을 목격하고 다시 미국에 가서 신학 공부를 하였다. 다시 돌아온 나라는 이승만 독재에서 박정희 군사 독재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암울하였건만, 문익환은 민주 운동은 동생 문동환 목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성서 번역에 열중하였다.

늘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으면서도 현실에서 한 발 물러나 하느님의 일에 헌신하던 목회자 문익환을 역사의 현장으로 불러들인 것은 전태일이라는 청년 노동자의 죽음이었다. 그이의 죽음은 문익환의 젊음을 일깨웠고, 문익환은 뒤늦게 찾아온 젊음을 '늦봄'이라는 아호에 담았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 천주교와 함께 공동번역 성서를 펴내는 일을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75년 8월 광복절을 맞아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 준비하던 장준하 선생이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장례위원장을 맡은 문익환은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듬해 삼일절을 맞아 3.1 민주구국선언서를 작성하고 그 일로 첫 번째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 뒤 가석방 상태에서 목숨을 마칠 때까지 18년 동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세 독재자에 맞서 싸우면서 9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감옥 밖에 있을 때는 늘 고난 받는 사람들 곁을 지켰다.

문익환 목사는 젊은 시절부터 매우 병약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아내 박용길 전도사가 여섯 달이라도 살다가 혼자 살 각오를 하고 결혼을 했을까. 그런 몸으로 남들은 은퇴를 준비할 나이인 쉰아홉 살에 운동의 길로 들어서 죽는 순간까지 열정으로 고난에 맞선 문익환 목사야말로 진정한 뜻의 청년일 수밖에 없다.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젊은이들과 이제는 장년이 되어 타성이 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익환 평전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문익환의 얼 속에 윤동주와 전태일과 장준하의 얼이 살아 있었듯이, 문익환의 삶을 기억하는 우리 가슴 속에도 문익환의 얼은 영원한 청년으로 살아 있을 것이다.


(* 문익환 평전이 나온 지 2년 만에 문 목사의 부모인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의 회고록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이 나왔다. 함께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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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장 쓰기 오늘의 사상신서 155
이오덕 지음 / 한길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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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어떤 사람이 쓰는 것인가? 이렇게 물으면 대개 시인이나 소설가, 수필가 아니면 평론가 같은 사람들이 쓴다고 할 것이다. 물론 학자들도 빼놓을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글을 읽는 독자일 뿐이고, 글을 쓰는 일은 전문가나 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문장 쓰기>는 그런 잘못된 통념을 깨뜨리는 책이다. 지은이 이오덕 선생은 오랜 동안 아이들 글쓰기 교육을 실천 연구해 온 경험과 우리 말 바로 쓰기 연구를 바탕으로,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 배움책을 펴냈다. 지은이는 이 책이 '지금까지 나온 어떤 문장작법 종류의 책과도 다르다'고 말한다. 어떤 점이 다른가를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지만, 여기서는 책을 읽은 독자로서 내가 느낀 점을 간추려 보겠다.

첫째로, 앞에서 밝힌 대로 보통 사람, 그 가운데서도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 길잡이책이라는 점이다. 지은이는 '글은 작가나 그밖에 특수한 사람만이 쓰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 곧, '농민도 어민도 노동자도 상인도 공무원도 교원도, 누구나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은 전문 문인이란 사람들이 방안에 앉아 관념과 상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겪은 온갖 일들과 생각을 써야 올바른 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자기 표현이 필요한 사람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쓰고 싶어도 어떻게 써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 쓰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둘째로, 병든 우리 글을 되살리려고 한 점이다. 학자들이나 전문 문인들은 한문글투를 비롯하여 일본글투, 서양글투로 우리 글을 더럽혀 놓았다. 이렇게 잘못된 글을 신문이나 잡지, 방송으로 퍼뜨리는 책임은 바로 글로 살아가는 사람 곧 지식인들이 져야 한다. 이 책에는 곳곳에 들어놓은 보기글마다 일일이 잘못된 점을 밝히고 바로잡아 놓아, 우리 말법에 맞는 바른 우리 글을 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셋째로, 아이들 글쓰기 교육에서 우러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글쓰기 교육을 참 삶을 가꾸는 수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보는 지은이는 그 동안 잘못된 글짓기 지도 -- 어른들의 문학 작품 쓰기를 아이들 글짓기 지도에 그대로 적용하는--를 비판하고 바로잡아 왔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문학이 너무나 잘못되어 있기에 어른들도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삶을 정직하게 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우리 삶을 바로 세울 수 있고, 병든 우리 글, 겨레 얼도 되살릴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정신은 이 책의 곳곳에 되풀이하여 강조되어 있다.

넷째로, 국어학이나 문학하는 사람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책이다. 그 동안 나온 여러 문장작법 종류의 책을 보면 외국 이론에 맞춰 써 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제 나라에서 제 아이들을 가르쳐 얻은 경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남의 나라 이론을 보물단지 여기듯 하는 학자들의 문장론 책과는 아주 거리가 먼 책이다.

다섯째로, 읽기 쉽고, 알기 쉬운 글을 쓰는 비결이 담긴 책이다. 흔히 교과서의 글은 유명한 작가나 시인이 쓴 글, 그 가운데서도 이른바 '미문'이라 하는 글들을 좋은 글이라고 아이들에게 보여 준다. 아니면 학자들이 쓴 어려운 글을 잘 쓴 글로 여기도록 가르쳐 왔다. 지은이는 이러한 아름다운 글, 어려운 글의 거짓을 밝혀 놓고 있다.

<우리 문장 쓰기>는 일하면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을 위한 책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마당이 신문이나 잡지의 독자 투고란인데, 지은이는 이런 투고란에 자주 글을 써 보낼 것을 권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저 신문이고 잡지고 책이고 전문 문인들이 주는 글을 받아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글을 써서 서로 살아가는 모습이나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만큼 빨리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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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피터 싱어 지음 / 세종(세종서적)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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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 제목은 'How are we to live?'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길인가?'를 묻는다는 건 참 어처구니없게 보인다. 바르게 사는 길이야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다 나와 있다. 어떤 사람은 유치원 때 배울 건 다 배웠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바르게 사는 게 뭔지 배웠으면서도 사람들은 바르게 살지 않는다. 아니 바르게 살지 않으면서도 바르게 산다고 착각을 한다. 피터 싱어는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자신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 책의 앞머리에 플라톤의 <국가>에서 인용한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가 나온다. 리디아 왕의 양치기인 기게스는 어느날 폭우를 피하려다 땅 속 구멍에서 금반지를 발견하게 된다. 반지를 끼고 다니던 기게스는 우연히 반지 구슬을 안쪽으로 돌리면 자기 몸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기게스는 이 반지를 이용하여 왕궁에 들어가 왕비를 유혹하고 왕을 죽인 다음 왕관을 차지한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은 과연 기게스처럼 행복이라는 왕관을 차지할 수 있을까? 피터 싱어는 '미국은 개인의 사익을 기초한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이라고 지적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미국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 미국의 범죄율'이라고 말한다. 1992년에 일어난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미국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건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약탈을 서슴지 않는다. 사람뿐 아니라 자연 생태계와 맺는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이전 농경 사회에서 사람은 자신의 노동력으로 일하여 생산한 만큼 소비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생산한 것에 의존해 살기보다는 물려받은 자산을 까먹고 있다'는 것이다. '산림을 베어 내면 낼수록, 광물을 수출하면 할수록, 토지의 이용을 촉진하면 할수록 우리의 GNP는 늘어날 것'이지만 그것이 자연 생태계에 후손들이 갚아야 할 빚으로 남는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이 책은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다. 그리하여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도 증명해낸다.

이기적인 사람들과 사기꾼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바르게 살 수 있는가? 한 가지 방법으로 싱어는 처음에는 친절하게 협력하고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한테서 대우받는 대로 되돌려 주는 방식을 소개한다. 컴퓨터 전략 게임에서 이 방식으로 짠 단순한 프로그램이 이기주의나 비열한 방식의 정교한 프로그램을 모두 이겨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감히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현세를 주도하고 있는 물질적인 자기 이익관에 대한 대안으로서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복원해야 한다.'(363쪽)

이 책 한 권이 바르게 살면서 제대로 사는 방법을 모두 가르쳐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길을 밝혀 주는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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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니모
포리스터 카터 지음, 김옥수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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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북아메리카 원주민을 다룬 책이 많이 나온다. '인디언'이란 말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한 데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아메리카라는 땅이름조차 원주민의 이름이 아닌 백인 중심의 이름이다. 원주민들은 그 땅을 무어라 불렀는지 궁금하다.

북미 원주민을 다룬 책 가운데 가장 알려진 것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일 것 같다. 이 책은 70년대 말에 번역되어 나왔다가 최근에 다시 나왔다. <운디드니>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멸망사라면 <몽골리안 일만 년의 지혜>는 북아시아에서 알래스카를 거쳐 북아메리카로 건너간 원주민들의 구전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그 밖에도 여러 권의 책들이 있지만,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제로니모>이다. 이 책을 쓴 포리스트 카터는 원주민의 후손으로 어린 시절 원주민인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던 이야기를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아주 재미있고 감동스럽게 쓰기도 했다.

<제로니모>는 아메리카 원주민 가운데 가장 용맹했던 부족인 아파치족의 마지막 전사 제로니모의 생애를 다룬 소설이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살아 남은 원주민의 증언과 미군과 멕시코군의 전쟁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제로니모가 활약했던 시대는 이미 북미 원주민들이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른 19세기 끝무렵이었다. 오랜 투쟁에 지친 원주민 종족들은 백인들에게 투항하기도 하고 화해를 모색하기도 했지만 백인들의 정책은 분명했다.

'인종 말살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올해 우리가 더 많이 죽일수록 내년에 죽일 숫자가 그만큼 줄어든다.' (셔먼 장군)

'모든 기독교 문명 정부가 그렇듯이, 우리 정부가 해야 할 일도 이들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말끔하게 지워버리는 것밖에는 없다.' (워싱턴의 인디언 관리국 국장 E. A. 그레이브스)

제로니모의 본디 이름은 하품하는 남자라는 뜻의 고크라예이다. 제로니모는 멕시코 마을 카쉬예의 수호성인 이름인데 고크라예가 자기 가족과 종족을 학살한 카쉬예 마을을 공격할 때 얻게 된 별명이다. 제로니모는 멕시코와 미국의 백인들에게는 잔혹한 아파치족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제로니모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어디에도 평화로운 삶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제로니모의 첫 번째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백인들에게 학살되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아내와 자식도 마찬가지로 목숨을 잃었다.

제로니모는 전쟁 주술사로서 아파치 부족들을 이끌고 멕시코와 미군을 상대로 하여 싸움을 이끌어가지만, 나중에는 아파치족들조차 보복과 학살이 두려워 제로니모를 따르지 않게 된다. 제로니모는 마지막으로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죽음만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는 종족을 이끌고 시에라 마더(어머니 산)로 탈출을 시도하다. 쫓고 쫓기는 탈출 과정이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되는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일만 년 전쯤 북아시아에서 건너간 우리 형제들이다. 그이들은 새로운 대륙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나 백인들은 그이들의 땅을 '발견'하고 그이들을 죽인 다음 그 땅을 차지하였다. 자신들에게 살 권리를 달라고 간청하는 원주민들에게 백인들은 대답한다. '인디언은 인간이 아니오. 법으로 정해져 있소.'

미선이와 효순이의 억울한 죽음 뒤로 이 땅에서 미국이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날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백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백성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듯하다. 과연 저들이 '무죄'인지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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