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5
김형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땅에서 ‘통일’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누구일까? 어떤 사람은 장준하 선생을, 어떤 사람은 문익환 목사를 떠올릴 것 같다. 70년대 장준하의 죽음 뒤에 자진하여 ‘대타’로 나서서 이 땅의 민주와 통일 운동을 이끌어간 문익환 목사.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 이건 진담이라고” 하며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노래하다가 정말로 평양을 방문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

김형수 시인이 다섯 해 동안 충실한 답사와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기록한 835쪽의 두툼한 평전은 우리가 그동안 단편으로만 알고 있던 문익환 목사의 삶과 활동을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그려낸 역작이다.

1918년 망명의 땅 북간도에서 태어나 1994년 세상을 떠난 문익환 목사의 생애를 읽는 일은 그대로 우리 겨레의 독립운동사와 민주 통일 운동사를 읽는 일이 된다. 북간도의 명동 마을은 이동휘, 안중근 같은 독립투사들이 머물다 간 곳이다. 그래서 어머니 김신묵 여사는 틈만 나면 자식들에게 “문씨네 밥을 먹지 않은 독립운동가는 없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문익환은 교사가 되려다 생각을 바꿔 아버지 문재린 목사처럼 목회자가 될 공부를 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자의 손아귀에 동무인 윤동주 시인을 잃고 맞이한 해방 공간에서 문익환은 좌익과 우익의 대립을 몸으로 겪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한반도의 남녘에 정착한 문익환은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6·25 전쟁이 나자 유엔군 통역이 되어 휴전 협정의 현장을 목격하고 다시 미국에 가서 신학 공부를 하였다. 다시 돌아온 나라는 이승만 독재에서 박정희 군사 독재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암울하였건만, 문익환은 민주 운동은 동생 문동환 목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성서 번역에 열중하였다.

늘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으면서도 현실에서 한 발 물러나 하느님의 일에 헌신하던 목회자 문익환을 역사의 현장으로 불러들인 것은 전태일이라는 청년 노동자의 죽음이었다. 그이의 죽음은 문익환의 젊음을 일깨웠고, 문익환은 뒤늦게 찾아온 젊음을 '늦봄'이라는 아호에 담았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 천주교와 함께 공동번역 성서를 펴내는 일을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75년 8월 광복절을 맞아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 준비하던 장준하 선생이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장례위원장을 맡은 문익환은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듬해 삼일절을 맞아 3.1 민주구국선언서를 작성하고 그 일로 첫 번째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 뒤 가석방 상태에서 목숨을 마칠 때까지 18년 동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세 독재자에 맞서 싸우면서 9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감옥 밖에 있을 때는 늘 고난 받는 사람들 곁을 지켰다.

문익환 목사는 젊은 시절부터 매우 병약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아내 박용길 전도사가 여섯 달이라도 살다가 혼자 살 각오를 하고 결혼을 했을까. 그런 몸으로 남들은 은퇴를 준비할 나이인 쉰아홉 살에 운동의 길로 들어서 죽는 순간까지 열정으로 고난에 맞선 문익환 목사야말로 진정한 뜻의 청년일 수밖에 없다.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젊은이들과 이제는 장년이 되어 타성이 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익환 평전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문익환의 얼 속에 윤동주와 전태일과 장준하의 얼이 살아 있었듯이, 문익환의 삶을 기억하는 우리 가슴 속에도 문익환의 얼은 영원한 청년으로 살아 있을 것이다.


(* 문익환 평전이 나온 지 2년 만에 문 목사의 부모인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의 회고록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이 나왔다. 함께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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