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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평점 :
머리는 위로 틀어 붙이고, 치마는 짧게 줄여 입고, 긴 양말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일본말 좀 하고, 영어 좀 알아듣고, 걸음걸이 활발하게 뚜벅뚜벅 길거리를 걸어 다니고, 파라솔이나 향수를 잘 사고, 천박한 미국 영화나 보러 다니고 (…) 진고개에 가서 그림 그려진 편지지 나부랭이나 사고, 사흘에 한 번씩은 옷을 바꿔 입어야 깨끗한 줄 알고, 연애니 뭐니 짓고 까부는 걸 능사로 알고 (…) 천박한 아메리카즘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자동차 타고 달리는 것 (…) 외모를 잘 꾸미고 키스 잘하는 여자가 신여성이 아니라 굳은 의지력과 (…) 모성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현실 생활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는 여성이 신여성이다. -팔봉산인 <소위 신여성 내음새>-신여성 2권 6호(24년 8월)
<신여성>은 1923년 9월에 창간되어 최대 76권, 최소 70권 발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편집인 및 주요 필진으로는 김기전, 이돈화, 방정환 등과 천도교 청년회가 있다. 발행인은 방정환, 차상찬이고 발행소는 개벽사이다.
신여성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는 당시 사회가 가진 잣대가 가감 없이 드리운다. 여학생이면 조신하게, 소비하고 향유하는 모던걸은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가정에 있는 여성들에게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여성이 가진 미덕이라고, 그에 더해 직업부인이 된 여성은 수퍼우먼이 되라고 강요한다.
남성 지식인에 의해 만들어진 잡지인 신여성은 요즘의 잡지와는 사뭇 다르다. 패션, 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실어 여성을 ‘계몽’하고자 하면서도(계도이지만) 여성들의 소비를 촉진시키는 글도 함께 실어 상반된 모습이다. 게다가 ‘은파리, 색상자’등으로 당시의 풍속이나 가십을 실어 신여성의 일상사를 풍자. 조롱하기도 하였다.
-하이칼라 여자들이 염색하고 머리를 구부리는데 아예 설사약 먹고 눈도 움푹하게 하고 밀가루 반죽으로 코도 좀 우뚝하게 하지?
-한동안 단발이 유행하더니 요새는 도리어 다리꼭지 드리는 것이 크게 유행. 수염 붙이는 유행도 생기겠군.
-서울 여자들은 날 좋을 때와 밤에도 우산을 쓰고 다닌다. (p.74) <신여성> 4권 3호
<신여성>의 어록, 십계명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길, 착한 계집은 사람을 괴롭게 하고 악한 계집은 사람을 못살게 한다.
-남성은 여성에 대하여 영원한 벗이 되길 희망한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을 자기의 주인으로 섬기든지 그렇지 않으면 종으로 여기려 한다. -양성어록 –양주동 <신여성> 3권 3호
<안심하고 사귈 수 있는 여자>
-이야기는 잘하지만 비밀은 꼭 지키는 여자
-쉽게 사귈 수 있지만 정조 관념이 굳은 여자
-아는 것 있지만 교만 안피우는 여자
-몸은 깨끗이 가꾸지만 허영심이 없는 여자
-세상 경험은 있지만 교활하지 않은 여자 –<신여성> 3권 4호
남성의 시선 안에 여성을 가두려는 의도가 분명한데 그것을 바라보는 여성들은 보기에 멈추는 법이 없었다. 여성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들을 <신여성>을 통해 이뤄낸 것은 아닐까.
100년 전의 여성 잡지인 <신여성>을 읽으며 당시의 사회상과 지금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재미로 읽기에도 손색이 없으나 읽다 보면 어느새 지금의 나, 혹은 지금의 여성이 있기까지 그 많던 신여성들이 존재했음에 가슴이 아려오기도 한다. 변화는 더디다고 했던가. 지난 100년에서 얼마나 우리는 미래에 닿아 있을까. 그때의 언니들이 기억하던 미래는 지금의 모습은 아니지 않았나 하는 씁쓸함이 든다. 그럼에도 당시의 시대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가치와 재미를 담았기에 이 책은 소중하다. 경성의 거리를 누비던 모던걸의 발자취를 따라 시간 여행을 해보시렵니까!
강력한 남성의 ‘시선’ 체제가 작동하는 담론의 장이 잡지 <신여성>임에는 분명하다. 그와 동시에 그 시선 체제를 탄생시킨 불온한 신여성의 존재감 또한 분명하다. 여우털 목도리 때문에 한껏 조롱당할지언정 비로소 자기 몸을 보살필 수 있는 여성이 등장했고, 교만과 허영으로 가득한 사랑을 꿈꾼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들의 불온한 무게감을 감지하는 것이야말로 <신여성>의 페이지를 읽어내는 지금 우리들의 ‘시선’일 터이다. (p.98)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