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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수명
루하서 지음 / 델피노 / 2024년 12월
평점 :


작은 기계 하나로 내 수명을 알 수 있고, 수명을 나눔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 사회는 또 어떤 변화들이 생겨날까? 장점도 있겠지만, 거대한 혼란과 함께 수명과 관련된 각종 범죄가 세상을 위협할 것 같기만 하다. 때문에 갑작스런 사고사를 제외한 내가 가진 수명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과연 좋을지 의문이다. 수명이 길면 괜찮을 수 있겠지만, 짧다고 나왔을 경우에도 과연 괜찮을까? 여러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여기에 각종 제약이 따르긴 하나 가진 수명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게 이상한 일일터였다. 잠깐 상상해도 초토화된, 난장판인 세상의 모습이 떠오를 정도다. 이렇게나 궁금한 소재의 이야기라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명은 내가 건강 관리를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늘어날 수 있고, 반대로 관리를 못하면 줄어들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강 관리에 힘을 쓰고, 자신의 수명에 맞는 계획을 짜 계획적인 삶을 살기도 한다. 반대로 짧은 수명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비관적인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가족에게 수명 나눔을 부탁했다가 가장 가까웠던 이들의 민낯을 보게 되기도 했다. 수명을 주고 받는 것에는 여러 조건이 있었다. 평생 단 한번 같은 혈액형을 가진 직계가족, 형제자매 그리고 배우자에게만 수명을 나눌 수 있고, 나눠준 수명만큼 내 수명이 줄어든다. 수명을 받는 사람은 5세 이상부터 가능하고 3번까지 나눔을 받을 수 있으나, 나눔을 하는 사람은 20세 이상의 성인만 가능하고 80년 이상의 수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혼인신고 후 1년이 지나야 배우자에게 수명을 나눠줄 수 있으며, 입양된 자녀도 1년 후 나눔이 가능하나 범죄 예방을 위해 다른 가족에게 수명을 나눠줄 수 없다.

민정우 - 이 모든 일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인물. 최악의 거짓말로 친구 도훈의 삶을 180도 바꿔놓았다. 그 죗값이었을까? 그의 수명은 길지 않았고, 가족들은 그에게 수명 나눔을 거부했다.
백도훈 - 가장 믿고 의지했던 친구 정우로 인해 잔뜩 꼬여버린 운명 속에 내던져진 인물. 정우의 죽음 이후 갑작스럽게 이별을 고하고 떠났던 전 여친 세희와 재결합을 하게 되었고, 결혼 1년 후 딸 은유가 태어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듯 했다. 하지만 결혼기념일 선물로 수명을 나눠달라는 세희에게 수명을 나눠준 후 도훈의 삶은 다시 한번 수렁에 빠진다. 세희가 자신의 딸 지아에게 수명을 나눠주기 위해 계획적으로 도훈에게 접근했고, 계획대로 수명을 넘겨받은 후 다시 본래의 가족에게 돌아갔음을 알게된 것. 그렇게 은유와 함께 처참하게 버려진 도훈은 12년 후 은유가 MER(아동기에 특별한 원인 없이 수명이 줄어드는 희소병. 수명 나눔으로 완치 가능.)에 걸렸음을 알게된다.
차세희 - 정우의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 도훈을 떠났던 인물. 딸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도훈에게 복수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접근해 수명을 빼앗아 MER을 앓고 있던 지아를 치료했다. 지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엄마이면서 똑같이 자신의 딸인 은유는 어쩜 그렇게 매몰차게 외면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정우의 거짓말을 믿기 전에 도훈을 더 믿고 대화를 나눠봤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흘러가지 않았을텐데.
오가연 -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아버지에게 벗어나려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도훈에게 거짓말을 해 결혼을 한 인물. 은유의 새엄마로서 은유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고, 도훈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던 것도 맞으나 거짓말이 결국 그녀의 발목을 잡아버렸다.
공태영 - 세희의 남편. 공금 횡령으로 회사에서 쫓겨난 후 빚을 갚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도훈과 세희 모르게 수명을 거래하게 되는 인물.
수명을 나눔하는 일로 가족의 진짜 속내를 알게되는 것만큼 최악의 일은 없는 것 같다. 입양 후 친자식처럼 키웠다면서 수명을 나눠주는 일에 온갖 변명을 끼워넣고, 몇십년을 부부로 살았어도 정작 수명을 나눠주는 일에는 도망을 가는 인간의 이중성은 씁쓸함을 안겨주었다. 수명을 나눠준만큼 줄어든다는데 무섭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하지만 먼저 떠나보내게 될 자식, 배우자의 빈자리가 줄어드는 수명보다 더 무섭고 고통스럽지 않을까? 인간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한 소설이었다. 가독성도 굳! 읽어볼만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