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돈키호테 (꿈의 책장 에디션)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4월
평점 :

“세상의 모든 외로운 돈키호테들에게”
“돈키호테 비디오의 주인인 돈키호테는 어디 가고 찐산초만 남았을까?”
3년 전 갑자기 종적을 감춘 돈키호테 비디오 주인장 ‘돈 아저씨’ 찾기 프로젝트
ㅡ
‘마침표가 되기보단 쉼표가 되겠다고.’
이 문장은 『나의 돈키호테』 초반부에 등장하는 슬이의 내면 선언이자,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정해진 루트대로만 살아오다 삶이 휘청이는 순간, 우리는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 순간을 쉼표로 바꾸어 말한다. 실패와 멈춤조차도 다시 이어질 수 있는 문장이다.
김호연의 『나의 돈키호테』는 인생의 중간에서 방향을 잃은 주인공 슬이가 과거의 기억과 우정을 되짚으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다만 그 여정은 현실적인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잊고 지냈던 사람과 신념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이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고전 『돈키호테』와 짙게 맞닿아 있다. 풍차에 돌진하던 괴짜 기사의 이야기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다른 이름의 돈키호테들을 소환해낸다.
슬이는 한때 외주 제작사에서 피디로 일하며 ‘도시탐험대’라는 프로그램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한순간의 실수와 구조조정 앞에서 직장을 잃고, 대전의 엄마 집으로 내려와 무기력한 시간을 보낸다. 도시에서 경주마처럼 달리기만 했던 그녀의 삶은 처음으로 멈춰진다. 그 쉼표 속에서 문득 떠오른 건, 중학생 시절 자주 드나들던 ‘돈키호테 비디오’라는 비디오 가게였다. 그리고 그 가게의 괴짜 사장님, 자칭 ‘한국의 돈키호테’라 불리던 ‘돈 아저씨’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돈 아저씨는 단순히 비디오를 빌려주던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 중학생들이 결성한 ‘라만차 클럽’의 정신적 리더였고, 스페인 소설 『돈키호테』를 필사하고, 언젠가는 그 필사본을 들고 스페인으로 가겠다고 말하던 몽상가였다. 슬이는 그의 흔적을 좇아, 유튜브 채널 ‘돈키호테 비디오’를 개설한다. 방송의 목적은 단 하나. 실종된 돈 아저씨를 찾는 것. 영상 속 그녀는 스스로를 ‘찐산초’라 부른다. 과거 돈 아저씨를 보좌했던 ‘산초 판사’처럼, 지금은 그의 마지막 여정을 찾아 나선다는 뜻이다.
등장인물들은 현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돈 아저씨(장영수)는 낡은 비디오 가게를 끝까지 지키다 홀연히 사라진 인물로, 현실에서는 미련한 이상주의자일 수 있지만, 슬이에게는 어릴 적 꿈과 낭만을 상징하는 존재다. 그의 아들 한빈은 아버지의 철없던 고집을 못마땅해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를 이해하고 있다. 건물주 할머니와 손자 성민, 그리고 라만차 클럽의 멤버들은 모두 과거의 기억 속에서 다시 소환되어 현재와 연결되는 고리 역할을 한다.
작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이 규정한 성공이나 기준과 다른 삶도 충분히 의미 있음을 말한다. 유튜브는 “세상에서 가장 큰 환전소”라는 대사가 상징하듯,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꺼내놓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 슬이는 더 이상 타인의 기준에서 ‘제 몫’을 찾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플랫폼에서 자신만의 모험을 펼쳐나간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현대적 돈키호테’가 사는 방식이다.
또한 이 작품은 고전을 오늘날의 언어로 새롭게 풀어낸다. 『돈키호테』가 단순히 ‘풍차와 싸우는 미치광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의 부조리와 싸우며 낭만을 지켜내려는 사람의 이야기였음을 소설 속 슬이는 영상으로, 말로, 몸으로 풀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책 속의 책, 고전의 재해석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을 울리는 순간은, ‘굿 윌 헌팅’의 한 장면을 소개하는 슬이의 유튜브 영상이다. “낫 유어 폴트(Not your fault)” 그 유명한 로빈 윌리엄스의 대사처럼, 돈 아저씨가 슬이에게, 그리고 그 시절의 아미고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도 어쩌면 그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세상이 너를 다치게 했지만, 너는 충분히 괜찮은 존재야.” 비디오 테이프 한 편에 그런 위로를 담아 건넬 줄 아는 사람, 돈 아저씨는 그런 어른이었다.
『나의 돈키호테』는 마음 한구석에 오래 묵혀둔 질문을 다시 꺼내 묻는다.
“나는 나만의 풍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이 책은 조용한 응원을 건넨다. 당신의 그 달리기가 비록 느려도, 남들 눈에는 어리석어 보여도 괜찮다고. 때로는 미치광이로 보일 만큼 순수한 믿음이 세상을 바꿨다고 말이다.
오늘도 길 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쉼표는 곧 새로운 문장의 시작이 될 것이다.
ㅡ
'나무옆의자 출판사'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인스타 #하놀 @hagonolza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안 보는 데선 미친 듯이 씹고, 보는 데선 살갑게 굴고, 그러다가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다신 안 볼 듯 싸우고, 그러고 나서도 서로 필요한 일이 생기면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또 같이 일하고. 일리란 게 다 그렇지, 라며 쿨한 척 뻔뻔하게 구는 사람들의 이합집산 생태계. - P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