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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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고통과 상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

폴 오스터의 마지막 장편소설 『바움가트너』는 생의 끝자락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한 철학자의 고요한 독백이자, 사랑을 잃고도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화려한 줄거리나 자극적인 반전 없이 그저 한 노인의 느릿한 일상과 생각들을 따라가지만, 그 속에는 죽음과 기억, 늙음과 사랑이라는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들이 담겨있다.

주인공 시드니 바움가트너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오랫동안 철학을 가르쳐온 노교수다. 그는 10년 전, 아내 애나 블루먼탈을 사고로 잃고 홀로 살아가고 있다. 애나는 시인이자 그의 지적·감성적 동반자로, 두 사람은 삶과 문학, 철학을 공유하며 깊은 유대감을 나누던 존재였다. 하지만 어느 날, 해변에서 서핑을 하던 중 파도에 휩쓸려 애나는 세상을 떠난다. 이 불의의 죽음은 바움가트너에게 깊은 상실을 안겼다.

소설은 현재의 바움가트너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따라가며,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기억과 회상의 파편들을 교차로 보여준다. 커피를 마시며 떠오르는 아내의 시, 책상 위 유고 원고를 정리하며 되새기는 대화, 오래된 사진을 바라보며 되짚는 젊은 날의 감정들—모든 일상은 애나를 통해 되살아난다.

과거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첫 만남과 사랑의 시작을 엿보게 된다. 1970년대 파리의 작가 모임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문학과 사유를 매개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애나는 불안과 우울을 지닌 복합적인 존재였고, 바움가트너는 그런 그녀의 고통까지도 사랑했다. 이 관계는 단지 낭만적인 연애를 넘어, 서로를 성장하고 감싸는 삶의 동반자로서의 깊은 연대를 보여준다.

현재의 바움가트너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마지막 강의를 준비 중이다. 그는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택하며, 철학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슬픔과 상실을 견디는 데 실질적인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전하려 한다. 그는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삶을 산 자로서, 상실을 견딘 자로서 말하고자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바움가트너는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아내 애나와 과거 인연이 있었던 한 여성으로부터 걸려온 이 전화는, 그가 9년간 붙잡고 있던 고통의 기억을 바꿔놓는다. 그 여성은 애나와의 마지막 통화를 회상하며 전한다. 애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평화로웠고, 그날 아침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도 “지금이 참 좋다”는 말을 남겼다고. 그 짧은 진실이, 바움가트너에게는 9년 동안 무거운 그림자처럼 남아 있던 이별의 기억을 따뜻하게 덮어주는 전환점이 된다.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애나는 고통 속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랑과 삶의 감각을 온전히 느끼며 세상과 연결된 채 떠났다는 것을. 그 후, 바움가트너는 상실의 고통 대신, 그녀가 남긴 아름다운 흔적들을 마음 깊이 간직하게 된다.

이 소설은 그런 바움가트너의 태도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죽음을 향해 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

폴 오스터는 이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내놓기보다는, 바움가트너라는 한 인물의 조용한 사유와 행동 속에서 답을 찾아가게 만든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건, 이 작품이 ‘늙음’을 어떻게 다루는가다. 바움가트너는 자신의 신체가 느려지고 약해지는 것을 냉정히 바라보면서도, 그 속에 삶의 깊이와 존엄을 놓치지 않는다. 늙어감은 단순한 쇠퇴가 아니라, 축적된 기억과 이해의 시간이며, 그 자체로 아름답고도 값진 인간의 상태임을 이 소설은 담담히 그려낸다.

한편, 주인공의 이름인 ‘바움가트너(Baumgartner)’는 독일어로 ‘정원사’를 뜻한다. 이는 그가 삶의 잔해 위에서 상실을 묵묵히 돌보고 가꾸는 사람이라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그는 매일같이 애나와의 기억을 다듬고 지켜내며, 사라진 것들을 다시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낸다. 삶을 떠난 이와의 관계마저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내면의 정원을 그는 스스로 가꾼다.

『바움가트너』는 결국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마지막 메시지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도 여전히 기억 속에서 그를 만나고, 함께했던 일상을 되새기며, 죽음과 마주한 현실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삶. 그것은 결코 위대한 여정도, 감동적인 투쟁도 아니지만, 오히려 그 평범함 속에 진짜 인생이 숨어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순간 속에서 그 사람을 떠올리고,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고. 또한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늙어감은 쇠퇴가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시간이라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고.

아침의 커피 한 잔, 책장 구석에 차지하고 있던 오래된 시집, 유년의 추억이 서린 음악 한 곡—이 책은 그 일상의 소소한 장면들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사랑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바움가트너』가 조용히 속삭이는 위로이자 철학이다.


'열린책들 출판사'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인스타 #하놀 @hagonolza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애써 이런 일까지 다 하다니. 똥 대가리와 이기적인 짐승들만 가득한 세상에 자비의 천사 같은 이런 선량하고 순진한 사람이 나타나다니.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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