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30년 방랑은 끝났다. 지금 그 자신이 일반적인 것이 되어 있다. 이단이, 정통 없는 시대의 정통이 된 것이다."
- <하루키 소설의 마침표를 찍다> 가와니시 마사아키
<1Q84>가 출간되어 한국에서 붐을 일으키던 2010년, 아버지가 이 책을 읽고 감탄을 하셨습니다. "와, 어떻게 이런 스토리를 생각해 냈을까?"
당시에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우리 아버지가 더 대단하다. 감각이 젊으신데?"
하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무라카미 하루키(49년생)와 아버지(42년생)는 7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하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무라카미 하루키(49년생)와 아버지(42년생)는 7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왠지 하루키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40대 정도의 젊은 작가로 인식됩니다. 저는 이런 부분이 하루키 붐과 적게나마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키 책을 읽으면 트랜디하고 뭔가 있어 보이지 않느냐는 독자의 욕구! 책도 분명 하나의 문화상품이고 그것을 소비하는 나를 표현하는 매개체입니다.
"분명한 건 부담 없는 교양을 세련되게 포장한 문화상품에 대한 독자들의 선호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3000원짜리 밥을 먹고 나서 5000원자리 캐러멜 마키아토를 마시는 세대' 아닌가. 하루키가 제공하는 건 적당한 무게와 함량의 교양이다."
"하루키 소설을 읽는 건 "그 자체로 교양 있고 세련된 문화 행위" -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문학평론가 박진
출처 : 중앙SUNDAY
문화를 소비하는 집단의 교양에 대한 열망. 물론 허세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대중의 니즈를 어느 정도 파악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맨 위의 글에서 하루키를 이단이라고 한 이유는 아마도 하루키가 특정 문단에 소속되는 기존의 일본 문학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일겁니다.
"그러나 자유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위험을 수반하듯이 그가 누리는 이 특권 또한 마찬가지다. 그 결과가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잘못하면 작가로서의 대인관계만 망가뜨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편안하고 안정적인 길을 택하지 않았다."
- <하루키, 키티, MUJI를 통해 본 일본의 문화 아이콘1>
문단에 속하지도 않고 30년이 넘게 소설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는 것은 하루키가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나태함에 빠지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립니다. 오히며 이 부분이 대중의 호기심을 더 자극하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도대체 소설 내용이 어떻길래 다들 이 난리야?" 하면서 말입니다.
"단카이 세대(전후 1차 베이비붐 시기인 1947년에서 49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 이전 세대인 평론가들이 하루키에 대해 주로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단카이 세대와 그 이후 세대의 평론가들은 하루키의 소설에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분석하였다."
- <문학아이돌론> 사이토 미나코
"문학잡지 그란타 편집장 존 프리먼은 무라카미가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거나 평단의 호평을 받기 어려운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로 그의 이야기는 즉흥적이지 않음에도 마치 그런 것처럼 여겨진다. 둘때로 그의 작품에는 익살과 해학이 있는데, 그런 요소를 가진 작가들은 당분간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 <이코노미스트> 2013.7.22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는 하루키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비교적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도 알려졌지만 오에 겐자부로의 말에서 하루키의 인기 비결이랄까 논란의 정점에 있는 이유의 유추가 가능합니다.
"일본은 1970년대 끝무렵에 무라카미 하루키, 1980년대에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작가가 나오자마자 전 세계로 이 작가들의 작품이 번역되어 펴져 나갔어요. 이 두 작가의 힘은 대단해서 그들의 구어푼 문체는 더욱 더 세계적인 추세로 확대되어가고 있지요. ...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소설은 잘 씌어진 문장이라 번역하기 쉽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영어나 프랑스어 번역가들이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서 좋은 번역을 해내고 있답니다. ... 노벨상 수상도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그럴 때 일본적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우리들이 걱정할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독자들이 생각할 몫이겠지요."
-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오에 겐자부로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소설의 문체가 문어풍에서 구어풍으로 바뀌는 시점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등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비판적이라기보다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 문학이 세계로 뻗어가는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분명 쉽게 씌여진 구어풍의 문체, 번역하기 쉬운 문장임에 틀림없습니다. 반면에 조금 가벼워진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나는 팔리지 않더라도 여유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소 순문학 소설을 계속해서 쓰고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흐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분명 무라카미 하루키로 시작되는 세대와의 선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장편소설 보다는 단편소설, 단편소설 보다는 에세이 (가 좋다)라는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저는 이 의견에 굉장히 동감합니다. 물론 이번 작품도 좋지만 말입니다. 에세이 중에서는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