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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늙어버린 여름 - 늙음에 대한 시적이고 우아한, 타협적이지 않은 자기 성찰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김영사 / 2021년 9월
평점 :
“이러다 할머니 되는거 아니야?” 나는 시간의 덧없음을 느낄 때마다 이 말을 뱉곤 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나이가 들어버린다는 것의 두려움으로 나는 ‘할머니가 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나는 은연중에 여성노인이 된다는 것은 무력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개인이 된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말을 나는 서슴없이 사용해왔고 내 말을 들은 친구들도 곧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리 모두 여성노인이 된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요절하지 않는 이상 나를 비롯한 모든 여자 아이들이 도달할 곳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노인이 된다는 것을, 특히 여성으로서 늙어버린다는 것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가 늙어버린 여름>의 저자인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할머니보다는 요새 인기를 누리고 있는 유튜버 밀라논나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젊은 시절을 페미니즘의 열풍 속에서 보내고 대학에서 문학을 연구하고 강의를 하며 열정적인 직업 생활을 했으며 이혼한 독신 여성으로서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여성.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은 다복한 가족들 사이에서 손자, 손녀들을 온화한 미소로 지켜보고 있는 할머니와는 상당히 대비되는 사람. 그녀는 나와 내 친구들이 한 번쯤은 꿈 꿔 봤음직한 독립적이고 능력있는 여성의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젊은 여성들의 역할 모델이 되기에 손색없어보이는 그녀도 자신이 노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그녀는 자신이 노인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한 이후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외로움, 자신감 하락, 혼자됨의 두려움 등을 겪는다.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이 겪은 ‘늙어버림’ 은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이었다. 그녀가 젊은 날을 불태우며 열광했던 페미니즘에서도, 평생에 걸쳐 열정적으로 수업해온 대학에서도, 단순히 식사를 하러 가는 식당에서도 그녀의 존재는 희미해진다. 그녀가 가진 사상은 어느새 낡은 것이 되었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그녀는 평범한 할머니가 되어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녀는 그 모든 변화의 원인이 자신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며 자신이 돌이킬 수없는 어떤 수순을 밟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리고 체념한다.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선택했던 혼자 살겠다는 결심이 이제 와서야 외로움과 기댈 곳이 없다는 두려움으로 돌아온다. 친구들과 함께 건강을 염려하고 자신에게 어떤 병이 찾아올지 불안에 떤다. 비슷한 변화들을 공유하고 함께 마음을 나눌 친구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친구들은 언제나 가족들의 품으로 생각보다 빨리 돌아간다. 그녀는 홀로 남은 자신만의 집에서 변해버린 상황과 마음을 고요히 바라보며 자신의 늙음을 사유한다.
사회적으로 능력있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이 자신의 늙음에 대해 말하는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다양한 층위에서 고통받는 여성들을 떠올렸다. 사회적으로 상층부에 속하고 비교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는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같은 사람들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주변 사람들과 정서적 괴리감을 느끼고 자존감이 떨어지며 건강이 악화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보다 못한 삶의 조건을 가진 여성노인들은 당장의 생계를 걱정하며 근근히 살아가기도 한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로 인해 전문적인 능력을 기르지 못했을 뿐더러 여성과 노인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는 취업 시장에서 여성 노인들은 당장 생계의 문제에서 자신의 노화를 체감하게 된다. 또한 가부장제 내에서 부여한 여성의 미의 기준은 여성이 나이가 들수록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기에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외모가 점점 무가치해진다는 두려움과 싸워야 한다. 남성 노인들이 그들이 가진 지혜와 연륜으로 평가받는 동안 여성들은 자신의 외모가 추해보이지는 않을지 걱정해야 한다.
나는 이제 더 적극적으로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싶다. 지금까지 나는 의식의 저변에 깔린 ‘늙어감’ 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해왔다. 나이드는 것에 대한 나의 두려움을 직면하고 무엇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지, 내 잘못인지, 그것이 혹시 사회적 차별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아닌지를 샅샅이 살필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나는 나이 드는 것이 두렵다고, 그래서 해결하고 싶다고. <내가 늙어버린 여름>의 저자인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처럼 말이다. 여성의 삶에 대해, ‘늙은 여성’ 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이 책의 저자가 있다. 그것을 읽고 다가올 미래를 비춰보기 위해 지금-여기의 여성 노인들에게 고개를 돌려본 내가 있다. 무수히 많은 순간 혼자였으며 앞으로도 그럴테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 우리는 계속 이야기될 것이라는 것, 어떻게든 함께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한 분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희망으로 삼으려 한다. 두려움을 직면하고 그것을 이야기 나누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를 완전히 혼자인 채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 서평은 김영서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