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계의 철학 - 측정 그리고 과학의 진보
장하석 지음, 오철우 옮김, 이상욱 감수 / 동아시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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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를 살펴보면 온도계의 고정점을 확정하고 수치온도계를 만들고, 각기 다른 상황의 온도 측정을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온도를 둘러싼 과학 이론을 정립해나가는데 200년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단순한 원리로 작동하는 줄로만 알았던 온도계를 두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고 논쟁해왔다니 어찌 그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장하석 교수의 『온도계의 철학』을 집어들었다.


이 책은 온도계에 사용되는 고정점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1장). 우리가 사용하는 섭씨 온도는 얼음의 녹는점과 물의 끓는점을 고정점으로 삼고 그 사이를 100개의 등분할로 나누어 척도로 삼는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도 물리적으로 '실제 고정점을 어떻게 찾아내는가'에 어려움을 겪었다. 끓음이 단순하고 균일한 현상이 아니었기 때문. 과학자들이 제시한 서른 개가 넘는 고정점 가운데 (포화 증기 압력과 온도간의 명확한 연관성을 바탕으로 한) 증기점을 표준으로 확립하고나서야 온도경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정점 표준을 정당화하는 과정은 인식론 측면에서 논쟁의 대상이기도 했다. "정당화의 토대 basis(*(우리의 감각기관을 바탕으로 한 고정점을 의미함)를 신뢰할 수 있느냐?"가 문제시되었기 때문. 이에 대해 저자는 '존중의 원리 principle of respect'를 제시했다. 측정장비의 사용은 감각을 선행표준으로 존중함으로서 이루어지고 그런 장비를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감각도 개선된다는 것.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고약한 순환논리에 빠진다.



일단 고정점들이 합리적인 수준에서 정해지자 그 다음으론 '고정점들 사이의 구간과 그 바깥에 있는 열을 어떠한 척도로 수치화할 것인가', 즉 규준적 측정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2장). 온도 측정용 유체가 온도에 따라 균일하게(선형적으로) 팽창하는지 검증할 수 없기 때문. 1840년대에 이르러서야 주요한 후보인 공기, 수은, 에틸알코올 중 '비교동등성'을 만족시키는 공기 온도계까 최선의 표준으로 확립되었다.



이어진 도전은 그 때까지 확립된 온도 범위 이상으로 척도를 확장하는 것(3장). 저온과 고온 모두 실험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수십년이 지나서야 극저온은 푸이에의 공기온도계, 고온은 웨지우드의 점토 고온온도계, 다니엘의 백금 고온온도계 등이 등장했다. 그렇다면 측량 확장의 타당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불확실한 여러 표준이 있을 때 그것들의 수렴에 의존하다보면 인식론 측면에선 토대론이 아닌 정합론을 채택하게 되는데, 저자는 이러한 정합론적 방법이 개념 형성과 지식 구축을 가능케한다고 보았다.



4장에선 관찰과 측정을 기준으로 정의되었던 온도가 어떻게 추상적 이론으로 확립될 수 있었는지를 다룬다. (19세기 중엽까지 온도는 넓은 범위에 걸쳐 일관되고 정밀한 방법으로 측정되었지만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이 이론적으로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은채 이루어졌다.) 온도 측정법에 관한 이론적 틀을 창안하고 처음으로 측정가능한 것으로 만든 주인공은 윌리엄 톰슨이다.(줄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절대온도 개념을 조작화 operationalization하고 타당성과 정확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념을 더 정교화할 수 있었다.



마지막 5,6 장에선 과학의 역사와 철학의 보다 일반적인 문제를 다룬다. 5장에선 첫 번째는 과학이 어떻게 발전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견해, 6장에선 저자가 말하는 '상보적 과학'으로 과학의 역사와 철학이 과학지식의 증가를 어떻게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상보적 과학이란 우리가 현재의 과학에 이르기 이전의 혼돈상황으로 고의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인식론적 반복을 시도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현재의 과학을 더 잘 이해하게 되거나 현재의 과학과 병행하여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이 흥미로웠던 까닭은 위의 내용을 기술하는데 있어 과학과 철학의 상보적 태도를 견지하는데 있었다. 각 장은 '역사'와 '분석'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역사'부분에선 온도 측정을 둘러싼 과학사를 소개하고 '분석'부분에선 그것의 철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온도 측정의 역사를 통해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유일한 방식은 아닐지라도) 인식적 반복을 통해 과학이 진보한다"인 듯 하다. 인식적 반복 epistemic iteration은 앎의 단계들이 각각 앞선 단계에 의존하면서 어떤 인식 목표의 성취를 높이고자 창출되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과학은 인식적 반복을 통해 단계별 성취를 이루어나간다는 것. 즉 우리의 감각적 경험에서부터 시작된 어떤 애매한 관념을 측정과 이론화를 통해서 보다 구체화하고 그 과정이 계속 반복되다보면 과학이 발전한다는 것. 저자는 온도 측정의 역사를 통해 토대론적 태도가 아닌 정합론적 태도가 과학의 진보를 이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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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드 - 기후 위기 시대, 제2의 전기 인프라 혁명이 온다
그레천 바크 지음, 김선교 외 옮김 / 동아시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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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드'의 사전적 의미는 격자, 바둑판의 눈금이다. 에너지 산업에서 그리드는 '발전원에서 소비자에게 상호연결된 전력망'을 의미하는데 책의 제목은 후자를 가리킨다. 


많은 사람들이 전기를 공급하는 에너지원을 둘러싼 환경오염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리드에 대해선 무지하다. 이 책의 저자 그레천 바크는 "전기문명이 확대될수록 그리드의 중요성은 커진다"고 말하며 "전지구적으로 탄소중립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려나가고 있지만 이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그리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 지적한다.


에너지 전환을 앞둔 시대. 그리드가 직면한 문제점을 인식하기 위해선 먼저 전기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기는 일종의 힘이다. (다른 동력과 달리) 생산과 동시에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사용될 수 있지만 전기를 저장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리드는 생산된 전력을 거의 실시간으로 배송하며 망이 연결된 모든 지점으로 표준화된 전류를 이송하고 그 구조는 (발전소에서 시작해 가정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발전소에서 시작해 발전소에서 끝나는 거대한 고리모양을 이룬다.


이는 그리드에 연계된 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력의 양과 소비되는 전력의 양이 거의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전력이 부족할 경우에도, 전력이 과잉공급될 때에도(안전을 위해 그리드의 전력공급이 차단되어) 대규모 정전사태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블랙아웃 사태는 단순히 생활의 불편에 그치지 않고 사회 시스템과 국가 안보에도 큰 위험을 일으킨다.



그리드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었을까?

1830년대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자기 실험을 수행한 이후로 사람들은 전기를 생산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전기가 대중화되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다. 초기 전기화 시대에는 개별 발전소와 직류 그리드 형태(에디슨 모델)로 공급되었기에 전기는 부유층,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다. 1889년 교류 전기 시스템의 발명(테슬라 모델)을 통해 조금 더 광범위한 영역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고 1891년 장거리 고압 송전망 가동, 1896년 최초로 나이아가라 폭포에 건설된 대형발전소를 통해 대규모 그리드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새뮤얼 인설이다. 그는 다양한 종류의 고객(공장 포함)을 유치하며 대규모의 중앙 집중형 발전소를 온종일 운영할 수 있는 수요를 만들어냈고, 오프 피크(야간) 전력을 기업에 싸게 판매하며 소규모 사설 발전소와 그리드를 폐기하는데 일조했다. 이런 규모의 경제는 전기의 생산, 판매, 전송 등 전력 산업을 표준화, 독점화하는 결과를 낳았고 궁극적으론 모든 산업이 전기를 바탕하는 전기문명 시대를 열었다.


위의 사실이 중요한 까닭은 현재 우리가 보유한 그리드가 바로 그 결정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발전소의 전력 생산 모델, 중앙 통제식 송·배전, 에너지 위기에 취약한 전력산업구조 등이 그것이다. (*미국의 경우 에너지정책법 개정으로 전력 중개 거래 규제가 완화되었고 전력 배전 산업이 자유경쟁체제에 들어갔지만 이는 그리드를 둘러싼 요금, 안전, 환경 문제 등을 야기하고 있다)


현재의 그리드가 왜 문제가 될까?

정보화 혁명 가속화, 운송 수단의 전기화 등으로 전기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자원고갈, 기후 위기 등으로 재생에너지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에 가정과 기업에선 태양열을 이용한 개별 발전 시설을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들은 그리드의 안정적 전력 흐름을 깨뜨린다. 전력의 공급과 수요가 가변적이고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 재생에너지는 에너지 생산량을 더욱 통제하기 어려우니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전력이 과잉생산될 경우 전력망 자체가 붕괴되고 수요를 맞추지 못할 경우 즉시 대응이 불가능하니, 현재 그리드 시스템에선 재앙에 가깝다.


또한 위와 같이 그리드 시스템이 변화할 경우 전력망 사용료 문제도 발생한다. 현재는 사용량에 따라 전기세를 징수하고 그것으로 그리드의 유지, 보수, 개선 등을 진행한다. 단방향 전력 공급이기에 가능한 수익 창출 및 투자 모델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그러나 개별 발전, 가변발전소가 늘어날 경우 그리드 사용료를 어떻게 책정할 것인지, 그로 인한 피해를 (개별 발전을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하진 않을지, 이제까지 공공재로 여긴 전기 역시 상품화되진 않을지 등등 여러 부수적인 사회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크다.


이렇듯 저자는 책의 중반부까지 미국의 그리드가 현재의 구조를 갖게 된 역사적 배경, 현재 그리드가 마주한 여러 위기를 언급하고 이어 미래 에너지 전환을 대비하기 위한 현대적 그리드 구성 방법에 대해 스마트 그리드와 소규모 분산 그리드를 소개한다.


그러나 이 역시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스마트 그리드는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하여 전력의 수요와 공급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소비자와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반면 전력회사가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다는 점, 이를 자신의 수익 극대화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또 하나의 대안인 작고 유연한 마이크로 그리드는 "분산된 에너지원과 여러 전력 부하 및 수용가를 통합, 상호운용 가능한 네트워크"일 수 있지만 우리가 이미 사용중인 그리드와 명확히 구별해내기 어렵다. 현재 전력 산업 구조 내 수많은 행위자들의 이해관계와 충돌되는 부분도 해결책이 마땅치 않다.


이외에도 전기를 저장하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한다. 현재 그리드 규모의 대용량 에너지 저장장치로 존재하는 것은 인공 호수(양수발전), 압축 공기 저장장치, 태양열 집중 타워, 태양광 반사통 발전소 등이 있지만 대규모의 조절 가능 전원이 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런 그리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미래 전력 사용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재생에너지 혁명에 적합한 에너지 시스템을 개발해나가야 된다고 강조한다. 에너지 전환이 대규모 유틸리티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지만, 현재 전력 산업 구조 내 이해관계 문제를 어떻게 조정해야할지,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그리드가 내포하는 기술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 그리드를 안전하게 포용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까지~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가 쌓여있다.


책의 후반부까지 읽고나니 우리나라의 그리드는 어떠한지 궁금해지더라.

친절하게도 이 책의 마지막에는 역자가 상당부분을 할애해 우리나라에서 논의되는 쟁점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상황은 한국전력공사라는 단 하나의 유틸리티, 심지어 송전과 배전이 분할되지 않은 구조라 한다. 이는 품질좋은 전기의 생산, 정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안정적 전력 운용, 낮은 전기요금, 송배전 손실 최소를 위한 효율적 통제 등을 가능케했지만, 우리나라 역시 에너지 전환 시대를 맞이하여 이런 구조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밀양 송전탑 갈등으로 불거진 불공정 상황, 재생에너지 보급으로 인한 그리드 안정성 문제, 원자력을 둘러싼 안전 문제 등이 그것이다. 미국의 전력 산업 변화가 우리보다 10년 정도 앞서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에서 제기된 2000년대 초 미국의 그리드 위기가 우리에게도 드러나기 시작한 셈이다.


정말이지, 이 책을 읽으며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단순히 재생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청정 에너지원에서 나아가 그리드라는 커다란 시스템의 유지·변화로 확장되어야함을 깨우칠 수 있었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꼭 읽어야할 책을 꼽으라면 당당히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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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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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7년 「마지막 로그」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가작을 수상한 오정연 작가의 소설집, 「단어가 내려온다」.


서울대 미학과 졸업, <씨네 21> 취재기자, 영상물기록관리 등을 거쳐 현재 싱가포르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과학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의 범상치 않은 경력(?)에 더욱 기대감을 갖고 읽어내려간 책이다.


그녀의 등단작 「마지막 로그」는 희귀병으로 절망한 주인공이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안락사 시설에 입소, 생을 마감하기까지 6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곳에서 주인공은 안드로이드 (서비스) 로봇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자신)이 우주에서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라 여겼던' 오만함을 내려놓고 생의 허무와 연약함을 느끼며 '소멸(안락사)'를 맞이한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반전이 있었으니 바로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인공에게 서비스를 제공한) 안드로이드 로봇의 로그 기록이다. 버그로 자유의지를 갖게 된 로봇이 주인공의 죽음을 지켜보며 처음으로 무언가를 원하는 의.지.가 생긴 것. 이런 예상치 못한 결말을 통해 작가는 '본능(or programmed)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의지)으로 사는 삶을 희망하고 견뎌내는 것'의 의미를 전하고 싶은 듯 했다.



표제작인 「단어가 내려온다」 에서는 저자 자신이 국어학 SF(?)라 명명했듯 독창적인 방식의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만 15세가 되면 어느 날 갑자기 '단어'를 받는다고 하는데, 아직 단어를 받지 못한 열 여섯살의 주인공은 이런 현상과 역사에 호기심을 느끼며 '국어학자'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엄마는 갑작스레 화성 이주를 통보하고 주인공은 "대기권 밖에서는 불길한 단어를 받는다"는 소문에 혼란을 느낀다. 그러나 화성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어떤 단어를 받게 된다.



인류의 진화와 함께 탄생, 역사를 오롯이 반영하고 있는 언어. 소설에서는 이를 주제로 '미래의 지구 밖- 국경도 인종도 종교도 없는 곳 - 에선 언어가 어떻게 존재할까', '여전히 지구에서 규정한 그대로 존재할까?', '사람들은 새로운 언어를 원할까?' 등 시대적 상상력을 일깨우며 미래 사회를 살아갈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한다.



이어진 두 편의 소설 - 화성에 이주해서도 원격으로 제사를 지내야 하는 한국인들의 에피소드를 담은 「분향」, 화성에서도 여전한 싱글맘의 육아전쟁과 편견을 다룬 「미지의 우주」 - 에선 미래가 와도 변치 않을 것 같은 문화적 DNA에 대한 문제의식을 일깨운다.



인간들의 기억을 싣고 홀로 우주를 떠도는 무인우주탐사선의 독백을 담은 「당신이 좋아할만한 영원」, 미래의 감각기록과 기억 아카이빙 서비스를 소재로 한 「일식」은 영상물기록관리학을 공부한 작가의 이력이 절실히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영원하지 않은 삶에 저항하기라도 하듯 영원한 기억과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인간중심적 사고의 면면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소설집에 담긴 일곱편 모두 곧 닥쳐올 미래 사회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 의식을 일깨우는 새롭고도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독창적인 방식에서 비롯되는 SF만의 재미를 흠뻑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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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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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를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자유와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것이 지배하는 지옥일 뿐"이라 말하며 "이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인간을 홀로 고립된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 개별화하고 탈연대화와 전면적인 경쟁을 부추기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렇다. 사회가 파편화되며 타인을 마주할 기회는 줄어들었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됨에 따라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도 더욱 멀어졌다. 경쟁이 심해진 사회에선 타인을 돌볼 여력이 없다.


그러나 타인이 배제된 삶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 연결과 결속이 허물어진 공동체는 두려움과 불안을 낳고 이는 결국 자기착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선 나의 삶을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서로를 향한 윤리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바로 타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


위와 같은 이유로 읽게 된 책이 이길보라 감독의 「당신을 이어 말한다」였다.


이길보라 감독은 2018년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둘러싼 서로 다른 기억을 담은 영화 <기억의 전쟁>을 만든 이다. 농인 부모에게 태어난 코다이면서 고등학교 1학년 때 공교육을 벗어나 학교 밖 '로드스쿨러'로 살아온 이력도 가지고 있다.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중심부에선 한참 떨어진 삶을 살아왔지만, 그녀는 이 책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 말하며 자신의 서사를 중심에 두고 새로운 세계를 그려나간 과정을 독자와 나눈다.


저자는 '장애인 부모를 둔 착한 딸'이란 사회의 기대를 거부한 경험으로 책을 시작했다. 자신이 '코다'인것을 인정하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를 선언하고 나선 것. 이어 그녀와 그녀 부모님이 겪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나와 다른 타인을 억압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불편한 시선을 거두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며 "서로의 온도차를 좁히기 위해선 누군가를 계속 이어 말하고 논쟁하고 토론하고 싸워 주체와 타자의 도식을 깨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그녀가 작업해온 영화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데, 베트남전쟁에서 일어난 학살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기억의 전쟁>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20대, 군대를 간 적도 없는 여성이 이런 영화를 제작했다는 것 자체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녀가 여성으로서 겪은 임신중지, 생리컵, 노브라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억압에 맞서나간 경험을 공유한다.


이렇듯 1,2부에선 개인의 경험에 대한 해방 서사를 다루었다면 3부에는 개인의 책임이 커지고 지나친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구조에 대한 목소리를 높인다. "개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한국사회의 획일화된 가치관, 집단주의, 심화되는 불평등 등을 깨부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는 질문과 함께.


이어 저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다수와 소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도를 지속해야하고 나아가 소수자들에게 도움이나 혜택이 아닌 대등한 권리를 설정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수인 당사자들이 하나의 정상성에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권리를 획득해나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그녀는 스스로를 '아티비스트(*예술가 Artist 이자 활동가 Activist 로 연대, 활동, 작업을 하는 이를 일컫는 말)'라 재정의하고 글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개개인의 노력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선 소수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나눌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어야한다.


이 책을 쓰고 읽는 것 역시 그런 시도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누군가는 이런 책이 나와는 상관없다, 혹은 불편하다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어떤 조건에서는 소수일 수 밖에 없고

어쩌면 자신이 억압당하는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변화의 시작은 항상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고 그것은 의도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기에

오늘도 난 당신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기 위해 이길보라 감독의 「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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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장도연·장성규·장항준이 들려주는 가장 사적인 근현대사 실황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
SBS〈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제작팀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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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눈길을 끌었던 SBS 시사교양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날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되었다. 


TV 방송이 탐사보도나 고발방식이 아닌 한 출연자(장도연, 장성규, 장항준)가 다른 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성이 특이했고 프로그램의 소재 역시 가벼운 가십거리가 아닌 우리나라 근현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주요 인물이나 사건을 상당부분 다루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관련 내용이 TV로 잠시 방영되고 휘발되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매체의 형식이 콘텐츠의 내용,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태도를 결정하는만큼' 많은 이들이 다시 한번 관련 기사나 자료를 찾아 읽었으면 좋겠다~싶었다. 때마침 책이 출간되었으니 챙겨보지 않을 수 없지~


이 책에는 방송에서 다룬 소재 중 7가지 -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 공작명 KT 납치사건,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탈옥수 지강현 인질극 사건, 1992 휴거 소동, 지존파 납치 살인 사건- 를 담고 있다. 책의 서술방식도 방송 구성 그대로 한 명의 이야기꾼이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듯 쓰여있어 쉬이 읽히더라.


이 책을 통해 사건이 벌어진 당시의 보도 행태나 사회분위기에 대해선 처음 알게 되었는데 과거 우리 사회 모습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이었는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김대중 전대통령 납치사건(공작명 KT 납치사건)'의 전말을 읽으며 1970년대 군사독재시절의 정치적 탄압과 끔찍한 인권 유린 현장을,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을 보며 경제개발이란 목표 아래 국민을 대상으로 얼마나 많은 국가적 폭력과 차별이 행해졌는지 엿볼 수 있었다. 


이 책에는 굵직굵직한 정치적 사건 뿐만 아니라 살인자, 탈옥수 등이 저지른 범죄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담겨있는데, 뉴스로 이를 접했다면 극악무도한 개인에게(만) 분노했겠지만 이 책을 통해 그를 둘러싼 상황과 맥락을 알게되니 범죄의 원인을 다각도로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특히, 각 장의 마지막에 삽입된 'PD노트'에는 '왜 과거의 특정 사건을 굳이 지금 다시 언급하는지', '이 사건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얼 시사하는지' 방송의 기획의도를 밝혀두었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세상엔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가 넘치지만, 현 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선 어떤 이야기는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치열하게 토론해야 하기 때문.


어쩌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프로그램과 책의 역할도 그것이겠지?!


1970년대 이후 한국사회를 뒤흔들어놓은 사건 속에 감춰진 이야기가 궁금한 이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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