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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드 - 기후 위기 시대, 제2의 전기 인프라 혁명이 온다
그레천 바크 지음, 김선교 외 옮김 / 동아시아 / 2021년 6월
평점 :
'그리드'의 사전적 의미는 격자, 바둑판의 눈금이다. 에너지 산업에서 그리드는 '발전원에서 소비자에게 상호연결된 전력망'을 의미하는데 책의 제목은 후자를 가리킨다.
많은 사람들이 전기를 공급하는 에너지원을 둘러싼 환경오염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리드에 대해선 무지하다. 이 책의 저자 그레천 바크는 "전기문명이 확대될수록 그리드의 중요성은 커진다"고 말하며 "전지구적으로 탄소중립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려나가고 있지만 이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그리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 지적한다.
에너지 전환을 앞둔 시대. 그리드가 직면한 문제점을 인식하기 위해선 먼저 전기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기는 일종의 힘이다. (다른 동력과 달리) 생산과 동시에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사용될 수 있지만 전기를 저장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리드는 생산된 전력을 거의 실시간으로 배송하며 망이 연결된 모든 지점으로 표준화된 전류를 이송하고 그 구조는 (발전소에서 시작해 가정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발전소에서 시작해 발전소에서 끝나는 거대한 고리모양을 이룬다.
이는 그리드에 연계된 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력의 양과 소비되는 전력의 양이 거의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전력이 부족할 경우에도, 전력이 과잉공급될 때에도(안전을 위해 그리드의 전력공급이 차단되어) 대규모 정전사태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블랙아웃 사태는 단순히 생활의 불편에 그치지 않고 사회 시스템과 국가 안보에도 큰 위험을 일으킨다.
그리드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었을까?
1830년대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자기 실험을 수행한 이후로 사람들은 전기를 생산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전기가 대중화되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다. 초기 전기화 시대에는 개별 발전소와 직류 그리드 형태(에디슨 모델)로 공급되었기에 전기는 부유층,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다. 1889년 교류 전기 시스템의 발명(테슬라 모델)을 통해 조금 더 광범위한 영역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고 1891년 장거리 고압 송전망 가동, 1896년 최초로 나이아가라 폭포에 건설된 대형발전소를 통해 대규모 그리드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새뮤얼 인설이다. 그는 다양한 종류의 고객(공장 포함)을 유치하며 대규모의 중앙 집중형 발전소를 온종일 운영할 수 있는 수요를 만들어냈고, 오프 피크(야간) 전력을 기업에 싸게 판매하며 소규모 사설 발전소와 그리드를 폐기하는데 일조했다. 이런 규모의 경제는 전기의 생산, 판매, 전송 등 전력 산업을 표준화, 독점화하는 결과를 낳았고 궁극적으론 모든 산업이 전기를 바탕하는 전기문명 시대를 열었다.
위의 사실이 중요한 까닭은 현재 우리가 보유한 그리드가 바로 그 결정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발전소의 전력 생산 모델, 중앙 통제식 송·배전, 에너지 위기에 취약한 전력산업구조 등이 그것이다. (*미국의 경우 에너지정책법 개정으로 전력 중개 거래 규제가 완화되었고 전력 배전 산업이 자유경쟁체제에 들어갔지만 이는 그리드를 둘러싼 요금, 안전, 환경 문제 등을 야기하고 있다)
현재의 그리드가 왜 문제가 될까?
정보화 혁명 가속화, 운송 수단의 전기화 등으로 전기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자원고갈, 기후 위기 등으로 재생에너지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에 가정과 기업에선 태양열을 이용한 개별 발전 시설을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들은 그리드의 안정적 전력 흐름을 깨뜨린다. 전력의 공급과 수요가 가변적이고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 재생에너지는 에너지 생산량을 더욱 통제하기 어려우니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전력이 과잉생산될 경우 전력망 자체가 붕괴되고 수요를 맞추지 못할 경우 즉시 대응이 불가능하니, 현재 그리드 시스템에선 재앙에 가깝다.
또한 위와 같이 그리드 시스템이 변화할 경우 전력망 사용료 문제도 발생한다. 현재는 사용량에 따라 전기세를 징수하고 그것으로 그리드의 유지, 보수, 개선 등을 진행한다. 단방향 전력 공급이기에 가능한 수익 창출 및 투자 모델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그러나 개별 발전, 가변발전소가 늘어날 경우 그리드 사용료를 어떻게 책정할 것인지, 그로 인한 피해를 (개별 발전을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하진 않을지, 이제까지 공공재로 여긴 전기 역시 상품화되진 않을지 등등 여러 부수적인 사회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크다.
이렇듯 저자는 책의 중반부까지 미국의 그리드가 현재의 구조를 갖게 된 역사적 배경, 현재 그리드가 마주한 여러 위기를 언급하고 이어 미래 에너지 전환을 대비하기 위한 현대적 그리드 구성 방법에 대해 스마트 그리드와 소규모 분산 그리드를 소개한다.
그러나 이 역시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스마트 그리드는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하여 전력의 수요와 공급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소비자와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반면 전력회사가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다는 점, 이를 자신의 수익 극대화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또 하나의 대안인 작고 유연한 마이크로 그리드는 "분산된 에너지원과 여러 전력 부하 및 수용가를 통합, 상호운용 가능한 네트워크"일 수 있지만 우리가 이미 사용중인 그리드와 명확히 구별해내기 어렵다. 현재 전력 산업 구조 내 수많은 행위자들의 이해관계와 충돌되는 부분도 해결책이 마땅치 않다.
이외에도 전기를 저장하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한다. 현재 그리드 규모의 대용량 에너지 저장장치로 존재하는 것은 인공 호수(양수발전), 압축 공기 저장장치, 태양열 집중 타워, 태양광 반사통 발전소 등이 있지만 대규모의 조절 가능 전원이 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런 그리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미래 전력 사용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재생에너지 혁명에 적합한 에너지 시스템을 개발해나가야 된다고 강조한다. 에너지 전환이 대규모 유틸리티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지만, 현재 전력 산업 구조 내 이해관계 문제를 어떻게 조정해야할지,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그리드가 내포하는 기술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 그리드를 안전하게 포용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까지~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가 쌓여있다.
책의 후반부까지 읽고나니 우리나라의 그리드는 어떠한지 궁금해지더라.
친절하게도 이 책의 마지막에는 역자가 상당부분을 할애해 우리나라에서 논의되는 쟁점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상황은 한국전력공사라는 단 하나의 유틸리티, 심지어 송전과 배전이 분할되지 않은 구조라 한다. 이는 품질좋은 전기의 생산, 정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안정적 전력 운용, 낮은 전기요금, 송배전 손실 최소를 위한 효율적 통제 등을 가능케했지만, 우리나라 역시 에너지 전환 시대를 맞이하여 이런 구조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밀양 송전탑 갈등으로 불거진 불공정 상황, 재생에너지 보급으로 인한 그리드 안정성 문제, 원자력을 둘러싼 안전 문제 등이 그것이다. 미국의 전력 산업 변화가 우리보다 10년 정도 앞서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에서 제기된 2000년대 초 미국의 그리드 위기가 우리에게도 드러나기 시작한 셈이다.
정말이지, 이 책을 읽으며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단순히 재생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청정 에너지원에서 나아가 그리드라는 커다란 시스템의 유지·변화로 확장되어야함을 깨우칠 수 있었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꼭 읽어야할 책을 꼽으라면 당당히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