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계의 철학 - 측정 그리고 과학의 진보
장하석 지음, 오철우 옮김, 이상욱 감수 / 동아시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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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를 살펴보면 온도계의 고정점을 확정하고 수치온도계를 만들고, 각기 다른 상황의 온도 측정을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온도를 둘러싼 과학 이론을 정립해나가는데 200년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단순한 원리로 작동하는 줄로만 알았던 온도계를 두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고 논쟁해왔다니 어찌 그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장하석 교수의 『온도계의 철학』을 집어들었다.


이 책은 온도계에 사용되는 고정점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1장). 우리가 사용하는 섭씨 온도는 얼음의 녹는점과 물의 끓는점을 고정점으로 삼고 그 사이를 100개의 등분할로 나누어 척도로 삼는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도 물리적으로 '실제 고정점을 어떻게 찾아내는가'에 어려움을 겪었다. 끓음이 단순하고 균일한 현상이 아니었기 때문. 과학자들이 제시한 서른 개가 넘는 고정점 가운데 (포화 증기 압력과 온도간의 명확한 연관성을 바탕으로 한) 증기점을 표준으로 확립하고나서야 온도경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정점 표준을 정당화하는 과정은 인식론 측면에서 논쟁의 대상이기도 했다. "정당화의 토대 basis(*(우리의 감각기관을 바탕으로 한 고정점을 의미함)를 신뢰할 수 있느냐?"가 문제시되었기 때문. 이에 대해 저자는 '존중의 원리 principle of respect'를 제시했다. 측정장비의 사용은 감각을 선행표준으로 존중함으로서 이루어지고 그런 장비를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감각도 개선된다는 것.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고약한 순환논리에 빠진다.



일단 고정점들이 합리적인 수준에서 정해지자 그 다음으론 '고정점들 사이의 구간과 그 바깥에 있는 열을 어떠한 척도로 수치화할 것인가', 즉 규준적 측정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2장). 온도 측정용 유체가 온도에 따라 균일하게(선형적으로) 팽창하는지 검증할 수 없기 때문. 1840년대에 이르러서야 주요한 후보인 공기, 수은, 에틸알코올 중 '비교동등성'을 만족시키는 공기 온도계까 최선의 표준으로 확립되었다.



이어진 도전은 그 때까지 확립된 온도 범위 이상으로 척도를 확장하는 것(3장). 저온과 고온 모두 실험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수십년이 지나서야 극저온은 푸이에의 공기온도계, 고온은 웨지우드의 점토 고온온도계, 다니엘의 백금 고온온도계 등이 등장했다. 그렇다면 측량 확장의 타당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불확실한 여러 표준이 있을 때 그것들의 수렴에 의존하다보면 인식론 측면에선 토대론이 아닌 정합론을 채택하게 되는데, 저자는 이러한 정합론적 방법이 개념 형성과 지식 구축을 가능케한다고 보았다.



4장에선 관찰과 측정을 기준으로 정의되었던 온도가 어떻게 추상적 이론으로 확립될 수 있었는지를 다룬다. (19세기 중엽까지 온도는 넓은 범위에 걸쳐 일관되고 정밀한 방법으로 측정되었지만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이 이론적으로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은채 이루어졌다.) 온도 측정법에 관한 이론적 틀을 창안하고 처음으로 측정가능한 것으로 만든 주인공은 윌리엄 톰슨이다.(줄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절대온도 개념을 조작화 operationalization하고 타당성과 정확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념을 더 정교화할 수 있었다.



마지막 5,6 장에선 과학의 역사와 철학의 보다 일반적인 문제를 다룬다. 5장에선 첫 번째는 과학이 어떻게 발전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견해, 6장에선 저자가 말하는 '상보적 과학'으로 과학의 역사와 철학이 과학지식의 증가를 어떻게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상보적 과학이란 우리가 현재의 과학에 이르기 이전의 혼돈상황으로 고의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인식론적 반복을 시도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현재의 과학을 더 잘 이해하게 되거나 현재의 과학과 병행하여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이 흥미로웠던 까닭은 위의 내용을 기술하는데 있어 과학과 철학의 상보적 태도를 견지하는데 있었다. 각 장은 '역사'와 '분석'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역사'부분에선 온도 측정을 둘러싼 과학사를 소개하고 '분석'부분에선 그것의 철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온도 측정의 역사를 통해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유일한 방식은 아닐지라도) 인식적 반복을 통해 과학이 진보한다"인 듯 하다. 인식적 반복 epistemic iteration은 앎의 단계들이 각각 앞선 단계에 의존하면서 어떤 인식 목표의 성취를 높이고자 창출되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과학은 인식적 반복을 통해 단계별 성취를 이루어나간다는 것. 즉 우리의 감각적 경험에서부터 시작된 어떤 애매한 관념을 측정과 이론화를 통해서 보다 구체화하고 그 과정이 계속 반복되다보면 과학이 발전한다는 것. 저자는 온도 측정의 역사를 통해 토대론적 태도가 아닌 정합론적 태도가 과학의 진보를 이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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