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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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7년 「마지막 로그」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가작을 수상한 오정연 작가의 소설집, 「단어가 내려온다」.


서울대 미학과 졸업, <씨네 21> 취재기자, 영상물기록관리 등을 거쳐 현재 싱가포르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과학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의 범상치 않은 경력(?)에 더욱 기대감을 갖고 읽어내려간 책이다.


그녀의 등단작 「마지막 로그」는 희귀병으로 절망한 주인공이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안락사 시설에 입소, 생을 마감하기까지 6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곳에서 주인공은 안드로이드 (서비스) 로봇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자신)이 우주에서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라 여겼던' 오만함을 내려놓고 생의 허무와 연약함을 느끼며 '소멸(안락사)'를 맞이한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반전이 있었으니 바로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인공에게 서비스를 제공한) 안드로이드 로봇의 로그 기록이다. 버그로 자유의지를 갖게 된 로봇이 주인공의 죽음을 지켜보며 처음으로 무언가를 원하는 의.지.가 생긴 것. 이런 예상치 못한 결말을 통해 작가는 '본능(or programmed)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의지)으로 사는 삶을 희망하고 견뎌내는 것'의 의미를 전하고 싶은 듯 했다.



표제작인 「단어가 내려온다」 에서는 저자 자신이 국어학 SF(?)라 명명했듯 독창적인 방식의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만 15세가 되면 어느 날 갑자기 '단어'를 받는다고 하는데, 아직 단어를 받지 못한 열 여섯살의 주인공은 이런 현상과 역사에 호기심을 느끼며 '국어학자'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엄마는 갑작스레 화성 이주를 통보하고 주인공은 "대기권 밖에서는 불길한 단어를 받는다"는 소문에 혼란을 느낀다. 그러나 화성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어떤 단어를 받게 된다.



인류의 진화와 함께 탄생, 역사를 오롯이 반영하고 있는 언어. 소설에서는 이를 주제로 '미래의 지구 밖- 국경도 인종도 종교도 없는 곳 - 에선 언어가 어떻게 존재할까', '여전히 지구에서 규정한 그대로 존재할까?', '사람들은 새로운 언어를 원할까?' 등 시대적 상상력을 일깨우며 미래 사회를 살아갈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한다.



이어진 두 편의 소설 - 화성에 이주해서도 원격으로 제사를 지내야 하는 한국인들의 에피소드를 담은 「분향」, 화성에서도 여전한 싱글맘의 육아전쟁과 편견을 다룬 「미지의 우주」 - 에선 미래가 와도 변치 않을 것 같은 문화적 DNA에 대한 문제의식을 일깨운다.



인간들의 기억을 싣고 홀로 우주를 떠도는 무인우주탐사선의 독백을 담은 「당신이 좋아할만한 영원」, 미래의 감각기록과 기억 아카이빙 서비스를 소재로 한 「일식」은 영상물기록관리학을 공부한 작가의 이력이 절실히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영원하지 않은 삶에 저항하기라도 하듯 영원한 기억과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인간중심적 사고의 면면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소설집에 담긴 일곱편 모두 곧 닥쳐올 미래 사회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 의식을 일깨우는 새롭고도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독창적인 방식에서 비롯되는 SF만의 재미를 흠뻑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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