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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평점 :
몇년 전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를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자유와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것이 지배하는 지옥일 뿐"이라 말하며 "이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인간을 홀로 고립된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 개별화하고 탈연대화와 전면적인 경쟁을 부추기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렇다. 사회가 파편화되며 타인을 마주할 기회는 줄어들었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됨에 따라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도 더욱 멀어졌다. 경쟁이 심해진 사회에선 타인을 돌볼 여력이 없다.
그러나 타인이 배제된 삶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 연결과 결속이 허물어진 공동체는 두려움과 불안을 낳고 이는 결국 자기착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선 나의 삶을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서로를 향한 윤리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바로 타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
위와 같은 이유로 읽게 된 책이 이길보라 감독의 「당신을 이어 말한다」였다.
이길보라 감독은 2018년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둘러싼 서로 다른 기억을 담은 영화 <기억의 전쟁>을 만든 이다. 농인 부모에게 태어난 코다이면서 고등학교 1학년 때 공교육을 벗어나 학교 밖 '로드스쿨러'로 살아온 이력도 가지고 있다.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중심부에선 한참 떨어진 삶을 살아왔지만, 그녀는 이 책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 말하며 자신의 서사를 중심에 두고 새로운 세계를 그려나간 과정을 독자와 나눈다.
저자는 '장애인 부모를 둔 착한 딸'이란 사회의 기대를 거부한 경험으로 책을 시작했다. 자신이 '코다'인것을 인정하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를 선언하고 나선 것. 이어 그녀와 그녀 부모님이 겪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나와 다른 타인을 억압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불편한 시선을 거두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며 "서로의 온도차를 좁히기 위해선 누군가를 계속 이어 말하고 논쟁하고 토론하고 싸워 주체와 타자의 도식을 깨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그녀가 작업해온 영화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데, 베트남전쟁에서 일어난 학살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기억의 전쟁>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20대, 군대를 간 적도 없는 여성이 이런 영화를 제작했다는 것 자체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녀가 여성으로서 겪은 임신중지, 생리컵, 노브라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억압에 맞서나간 경험을 공유한다.
이렇듯 1,2부에선 개인의 경험에 대한 해방 서사를 다루었다면 3부에는 개인의 책임이 커지고 지나친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구조에 대한 목소리를 높인다. "개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한국사회의 획일화된 가치관, 집단주의, 심화되는 불평등 등을 깨부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는 질문과 함께.
이어 저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다수와 소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도를 지속해야하고 나아가 소수자들에게 도움이나 혜택이 아닌 대등한 권리를 설정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수인 당사자들이 하나의 정상성에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권리를 획득해나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그녀는 스스로를 '아티비스트(*예술가 Artist 이자 활동가 Activist 로 연대, 활동, 작업을 하는 이를 일컫는 말)'라 재정의하고 글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개개인의 노력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선 소수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나눌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어야한다.
이 책을 쓰고 읽는 것 역시 그런 시도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누군가는 이런 책이 나와는 상관없다, 혹은 불편하다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어떤 조건에서는 소수일 수 밖에 없고
어쩌면 자신이 억압당하는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변화의 시작은 항상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고 그것은 의도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기에
오늘도 난 당신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기 위해 이길보라 감독의 「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추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