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이 태안에 살아요. 기사 양반, 태안 알아요. 태안? 옛날에 기름 유출 사고 터진 곳 말이에요. - P71

노인이 애인을 처음 만났을 때 애인은 전립선암 2기, 노인은 유방암 3기였다. 병원 휴게실에서 같이 아침 드라마를 보다가 서로 마음이 통했고 외로운 사람끼리 돌보고 의지하며일 년 남짓 연애했다고 노인이 말했다. - P75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걸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 P85

창문에 바짝 얼굴을 붙이고 애인을 바라보았다. 눈에 담는다는 표현이 그 순간만큼은 비유가 아니었다. 그 열렬하고도 미련한 몸짓이 우스워 박광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P91

손님들은 언제나 빨리 가달라고 요구했다. 박광일이 제시간에 기차역에 도착하면, 아기가 나오기 전 병원에 도착하면, 멀어지는 차를 추격해 따라잡으면, 손님들은 덕분에 살았다며감사 인사를 전하곤 했다. 반대로 간발의 차로 기차역에 늦게다다랐을 때, 차가 막혀 도로에 갇혔을 때, 손님들은 비난과질타를 때로는 저주를 퍼부었다. 간혹 돈을 낼 수 없다고티는 이들과 실랑이를 하기도 했다. - P96

쉬었다 가자고요. 평택호에는 물고기가 많이 살거든요. 운이 좋으면 그게 튀어오르는 모습도 볼 수 있어요. 아마 스트레스가 확 풀릴 거예요. - P111

딱 오분. 오분이 지난 후에도 여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숲으로 들어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박광일은 눈을 감았다. 흙더미에 깔린 상황에서도 졸음이 몰려왔다.
잠은 죽음에 대한 예습이자 복습 같았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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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집에 올 수 있냐.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을 때 영지는일이 많아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핑계는 아니었다. - P9

"알아. 내가 그걸 모르겠어? 연봉 협상 시즌 두 달도 안 남았잖아. 오히려 영지씨한테는 잘된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정 힘들면 내년 초에 계약직 한 명 뽑아줄게. 그때까지만 고생해주라." - P11

생각해보면 그때 그냥 넘기지 말고 이유를 캐물었어야 했다.
아버지는 특별한 이유 없이 딸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 P11

"어제 용돈 보냈더라? 느그 아빠한테도 말했어? 이거 우리둘 비밀이가. 고맙다, 우리 딸. 아침 챙겨 먹고, 쉬엄쉬엄 일해라. 느그 아빠는 뭐 놀러갔겠지. 언제 얘기하고 나가는 거 봤냐? 지겨워 죽겠다." - P13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명절이 되면 댐 앞에 모여 함께 망향제를 지낸다고 했다. 영지는 잃어버린 고향땅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 틈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영혼의 거처를잃어버린 사람들의 비통함과 해방감을 누리는 이의 격정은 쉽게 구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 P17

"조금 잘렸다."
"뭐가?"
"발가락이." - P21

"산에 갔다가, 눈앞에 있길래 따왔지. 진짜 송이인가 싶었는데 정말이더라고. 운이 좋았지."
"주인 있는 산에서 따온거네. 훔친 거잖아, 그럼." - P35

영지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여자는 해맑은 얼굴로 영지를 마주보았다. 또 저 얼굴이다. 영지가 두려워하는 한서 사람의 얼굴, 천진하고 악의 없는 표정. - P49

그 돈으로 영지는 얼마나 위안을 얻었던가.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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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책을 쓰면서 수없이 반복하는 것은, 이상하지만 자기가쓴 것을 다시 읽는 일이다. 계속 써나가기 위해, 갑자기 딴얘기로 새지 않기 위해, 더 정확한 글로 완성하기 위해 조금 쓰고 읽고, 또 조금 쓰다가 읽는 일을 반복하며 자신의글을 점검한다. · 앨범도 마찬가지이다. - P7

그날 나는 무대라는 것이뒤통수 쪽으로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쪽에서는 어쩌면 내가초라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더 예술가처럼 보이려고 안달복달하면서 이십대를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소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한창 겉멋에 취하는 나이라고 느긋하게 봐줄 줄 아는관용이 내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런 철없고 무모한 태도가 역설적으로 이십 대를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로 만들어주는 거라고도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기 자신의 이십 대를 마냥 너그럽고 흐뭇하게 봐주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유치한 시절을 소환해꼭 이야기하고 싶은 예술가가 있다. 지난날을 빠르고 쌀쌀맞게 훑어보겠다. - P17

너무나 좋아하지만 가끔만 들여다보는 시가 있다. 왜가끔만 들여다보느냐면 그 시를 읽을 때마다 내가 너무 많이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를 읽을 때마다 너무 많이 우는 내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 P25

패배를 사랑하는 건 우리의 직업병웃다가 쓸쓸해지는 건 얼굴이 미래를 보았기 때문 - P27

음악가는 멋이 있는 직업군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근사한 부클릿을 살펴볼 때, 때 빼고 광낸 한 곡 한 곡을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들을 때, 무대 위에서 노래하거나 연주하고 있는 음악가의 눈빛이나 집중하기 위해 만드는 미간의주름 같은 것을 볼 때, 이 직업은 명백하게 멋이 있다고 음악가인 나조차 뻔뻔하게 수긍한다. - P33

갖고 싶어 새로운 이름다르게 살아보고 싶어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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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의 최종 빌런처럼 불편한 변화의 배후에는 늘 노화와 스트레스가 도사리고 있다. 원인을 알더라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는 뜻이다. 서브스턴스 주사가 실비 보험 적용을 받지 않는 한 노화는 불가피하다. - P260

비슷한 실수의 반복을 막는 제동 장치가 되지 못한다면 이런 종류의 착한 척은큰 의미가 없다. 적당한 선에서 작작 해야 한다. 결국 누군가는 실제로 한 행동만큼의 존재가 맞다. - P266

한국은 직업부터 부동산까지 온갖 카테고리에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급을 따져 매기는 곳이다. 하다못해 노는 것도 예외가 아니다. - P270

수개월에 걸쳐 온갖 싫은 것들을 한 권 분량으로 자분자분 씹었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그 와중에도 좋아하거나 그리워하는 것들을 자백한 기분이 든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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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은 어떤 순간에 움직일까? 누군가는 원자와분자의 배열에서 정연한 시를 읽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실성을 무시한 왜곡과 오류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도 한다. - P196

경험치가 수정되면 사고의 체계나 감정의 양상도 달라진다. 무엇보다 감동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다. - P197

며느리의 눈을 피해 며칠에 걸쳐 단팥빵 미션을 수행하는 할머니를 상상해 본다. 팔의 은근한 단맛처럼 헤아리는 데 어느 정도의 세월이 필요한 마음도 있다. - P208

"테라가 더 맛있는 거 같은데." - P213

삿포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파리에서는 은근한 인종 차별을 겪었고 방콕에서는상습적으로 바가지를 씌우는 택시에 시달렸다. 여행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여행이 갑자기 싫어진다. 낯선 도시를 겪는 일은 새로운 실망을 배우면서 다녀온 이후의 허탈함을 수습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P217

"그 사람이 그립지는 않아. 정말이야. 내가 그리워하는게 뭔지 알아? 그는 ‘개념‘이 그리워." - P217

결국에는 음식이나 풍경혹은 그 외의 무엇보다도 지금의 이 기분이 목적지였을 거다. 지도를 들고 근처를 맴돌기만 하다가 마침내 가려던 곳에 닿은 느낌이다. 오래 머물기는 어렵다. 잠시 왔다가 곧사라질 시간을 천천히 음미했다. - P221

마찬가지로 조심해야 할 키워드가 몇 개 더 있다. 철이 너무 빨리 든 아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비인간, 할 말을 삼키면서 하는 담담한 이별, 혈연 이상으로 애틋한 유사 가족 같은 것들이다. - P245

그래서몇 겹으로 덮여 있는 누군가의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마음은 좀처럼 짐작하기 어렵다. 기쁠 때도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어떤 슬픔은 웃음 아래에 있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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