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선과 냄새. 씻지 않은 몸에서 나는 수컷의 비린내. 게다가 보풀이 인 플리스 집업에 통이 넓은 반바지, 낡은 검정 러닝화 외출을 위해 마지못해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걸친 것들. 아마 담배를피우러 나가거나 마트에 가려는 것이겠지. 앞집에 사는 사람치고자주 마주치는 편은 아니었으나 볼 때마다 그는 비슷한 차림이었다. 양치는 했을까? 재원은 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를 집어들고도어록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 P185

아내나 딸이 수다스러웠던 것도 아닌데, 둘이 떠난 공간에마치 적막이라는 낯선 세입자가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 P185

짧은 머리에 수염 자국이 거뭇한 사십대 중반의 남자가 여성용팬티스타킹에 힐만 신은 모습이라니. 역시 기괴한가, 생각했으나그래서 재원은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 P188

너는? 나도 너 레즈 될까봐 걱정인데? 재원은 웃으며 상미의가슴을 쓰다듬으려 했다. 상미는 재원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물었다. 너, 네가 남자인 거, 그걸 잊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나랑결혼해. 재원은 아무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잊을 수있는 게 아니야. 상미의 손이 느슨해졌고 재원은 상미에게 키스를 했다. 상미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재원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우리끼리만이야. - P191

자신의 정체성을 과하게 드러내지도 감추지도 않는자신감이 재원은 부러웠다. - P195

오프 잡을까요? - P203

아빠. 세라가 재원의 말을 끊었다. 응?
그만하면 안 돼? - P215

그냥, 사람이면 돼요. 저는. - P231

코요의 살이 닿자 재원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피부가 찌릿했다. 재원은 혼란스러웠다. 이것은 매혹인가 혐오인가. 둘 다인가.
둘은 하나인가. 재원은 은근슬쩍 코요의 팔을 뺐다. - P215

언니 아니라고, 씨발. - P217

작가는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서 서성이는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위치인 동시에 시대가 부여한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경계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의 내면에 감추어진 각자의 소수성을 찾아내고 관찰하는 것이 나의 임무. 그들이 오십대 남성이건, 십대 소녀이건, 나는 꾸준히 그들을 찾아나설 것이다. 그런 의미로 나는 성실한 작가가 되고 싶다. 힘을 주세요. 내일은 좀더 나은 글을 쓸 수 있기를. 오늘도 잠들기 전에기도해본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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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잃음 사이 - P169

. 우리는 수진을따라 이름 바깥의, 우리가 열어보지 않아 비밀에 부쳐진 면면에머무르게 된다. 머무른다는 것은 멈춰 있다는 것과 분명 다르다.
끝끝내 어딘가에 이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 P179

여름에는 장마랄 것도 없이 지나갔는데 10월이 되자 하루건너비가 내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재원은 우산도 쓰지 않고 횡단보도를 뛰어가는 여자를 눈으로 좇다가 신호가 바뀌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차가 경적을 울렸을 때에야 재원은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았다. 전방을 주시하고 도로를 달리면서도 재원의 시야에는 좀전에 보았던 여자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 P183

실내는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이 적막이 낯설던 때가 있었다. - P185

그것이 위안이 되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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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참 이전에 나는 세상의 사랑과 기쁨도 인간의 아픔과슬픔처럼 노래하는 시인이다. 나는 대여섯 가지의 예술장르들을 섭렵하면서 그중 글쓰기로서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들은 다 하고 있다. - P186

어느덧 이제 나는 부모형제 일가친척 하나 없는 완전한고아가 되었다. 이제 내 곁에는 정말 아무도 없다. - P188

사랑을 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게 아닌 줄 알면서도사람들은 다시금 사랑에 빠진다. 어리석어서가 아니고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짐승이 자신의 불행과 맞서 싸우는 가장 현명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 P190

본시 인간은 그처럼 자신이 자신의 안개이자 늪이니까. - P191

나는 ‘인간‘을 의심하였기에 작가가 되었다. 인간을 신뢰했더라면 문학이 아니라 정치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을 사랑했다면 돈을 벌었을 것이고 인간과 세상을 연민했다면 종교인이었을 것이다. 이러니 나는 내 어둠에 불만이 없다. - P196

"한 작가의 문학은 그 작가가 죽고 나서의 일이다." - P199

죽고 나서의 일은 시체들에게 물어보라. 흙먼지에게 물어보라. 재에게 가서 물어보라. 예술도 사람의일이다. 의지가, 사라지지 않을 권리를 만든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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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교실에서 그림책은 책장 맨 아래 두 칸을 차지하고있다. 그림책은 크기가 제각각이라 정리하기 어렵고, 몇 쪽되지 않아도 무겁기 때문이다. 키가 제일 큰 그림책을 기준으로 선반 높이를 조정했는데도 더 큰 그림책이 자꾸 나타난다. 그렇다고 비스듬히 세워 두면 책도 상하고 공간도 낭비된다. 그럴 때는 책등이 드러나도록 책을 눕혀 꽂아 둔다. - P9

좋은 그림책은 어떤 것일까? 나에게는 뚜렷한 기준이 있다. 어린이를 독자로 삼은 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을해석하기가 너무 어렵지 않을 것, 내용이 선명할 것, 주인공이 어린이에게 친근한 인물일 것, 어른의 만족이 아니라 어린이의 즐거움을 위할 것. 때로 이 기준에 어긋나면서도 좋은 책을 만나기는 하지만 마지막 조건만큼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림책은 어린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 P11

새 학년이 시작될 무렵이면 독서교실 어린이들과 ‘예언하는 글‘을 써 본다. 올해 학교생활에서 일어났으면 하는 일을자기 암시 형식으로 적는 것이다. 평소에 ‘소원‘이라고 하면
"우리 가족 모두 오래 살기" "세계 평화 같은 추상적인 내용이나 "돈이 엄청 많은 과학자 겸 농구 선수 겸 유튜버 되기"
처럼 거창한 장래 희망을 쓰는 어린이들도 이 주제로 글을쓸 때는 태도가 달라진다. - P17

글쓰기 시간에 3학년 어린이들과 선거용 문구를 만들어보았다. 지우의 제안에서 시작된 작업이었다. - P25

팬데믹 이후 사회생활이 단절된 어린이들에게, 미디어를통해 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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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폭발시키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잠시 뒤 나는 히데오에게 전화를 걸어 합격 사실을 알렸고, 히 - P153

"아 근데, 저번에 너랑 같이 있던 애 있잖아. 개 일본인이었다가 귀화했다며?" - P153

히데오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때려주고 싶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이자 자기가 <따귀 게임>의 불량소년 역에지원하게 된 중요한 단서임을 전하려는 것 같았다. - P155

마침내 환한 빛이 어둑한 소극장 가득 번쩍여서 저절로 눈이감겼을 때, 눈꺼풀 안쪽에 박힌 빛의 파편이 망막을 파고들었을때, 나는 머리 위로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그리고 환한 빛 속에서 히데오를 만났는데, 그 사람은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 언젠가 히데오가 내게 말해준 또다른 히데오였다. - P160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영도는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여자 감독들이야 피해의식에 찌들었으니까 페미 영화 같은 걸만들지." - P162

"그럼 넌 이제 비밀이 없어?"
히데오는 또 한번 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새로 생긴 비밀이 아주 많지." - P165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시간과 타인이라는 두 겹의 필터가 화자에게 덧씌워져 있다고 생각했다. - P168

한 사람에게로 다다르는 가장 쉬운 길은 이름일 것이다. 누군가를 무어라 이르는 일, 혹은 무엇이라 부르기로 마음먹는 일은그에게 가까워지기 위한 첫걸음이자 이해의 출발점이 된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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