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기 위해 드라마를 봤다. - P15

매주 월요일은 아파트 단지에 장이 서는 날이었다. 나는 월요일이면 장터에 나가 떡볶이와 순대를 사 먹었다. 그리고 노각을 서너 개씩 샀다. 가게에서 일하는 청년은 노각을 물외라고 불렀다. - P21

두시가 되려면 삼십 분이나 남았는데 이미 그가 와 있었다. 나느 따뜻한 커피를 그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 P25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일곱 번이나 틀렸다. 태풍이 온다 그래서 나는 소파의 위치까지 바꾸었다. 거실 창 바로 앞으로, 아로마 향초도 하나 사두었다. 소파에 앉아 비를 실컷 구경할 마음으로. 그랬는데 태풍은 오지 않았다. - P27

고등학교 2학년 때 테니스 라켓에 맞아 손가락이 부러진 걸 시작으로 나는 지금까지 다섯 번이나 뼈가 부러졌다. 윤정은 그때마다 깁스에 자신의 사인을 가장 먼저 남긴 친구였다. - P35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해에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 P45

그리고 마침내 여섯번째로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렇게애를 써서 나는 그냥 어른이 되었다. 그 생각을 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구급대원이 내 입에 귀를 가까이 대고 물었다. "뭐라고요?
방금 뭐라 말했나요?"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추워요"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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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엄마는 시침을 떼는 데는 선수였다. 정섭이 볼거리가 엄마의 비법으로 감쪽같이 나았다는 걸 엄마한테 보고할 때 나는엄마가 그 따위 돌팔이 처방을 가지고 너무 잘난 체를 하게 될까봐 은근히 걱정을 하면서 사실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나을 때가 됐으니까 나았을 뿐이라고 내 흥분을 간단히 윽박지르지 않았던가. - P41

삐걱 소리도 사람을 놀라게 했지만 무엇보다도 남들한테 우리가범한 흔적을 보이기가 싫었다. 아직도 행인이래 봤댔자 인민군이고작인데도 우리는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남의 이목이란 실은 우리의 양심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번 해 먹은 집 앞에는얼씬도 하기 싫었으니까. - P45

일사후퇴 후 달포가 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죽은 듯이 움츠리고 있던 사람 사는 모습이 별수 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희네하고 좀 더 왕래가 잦아졌다는 것 외에는 길에서 인민군 외의 민간인과 만나지는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는데도분명히 우리가 손댄 일이 없는 집들이 사람 손을 탄 흔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 P48

영천시장엔 한 귀퉁이에 제법 시장까지 선다고 했다. - P49

엄마는 평소의 엄마답지 않게 그 말도 안 되는 약을 가지고장담을 할 뿐 아니라 어서 가서 그 처방을 일러 주지 않는다고성화를 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정희네로 내려가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 얘기를 해 주었다. 뜻밖에 정희 엄마는 나도 믿지않는 얘기를 솔깃하게 들어 주었다. 그리고 어려서 궂은 파리에물려서 부어오른 자국을 할머니가 핥아 주던 얘기를 했다. - P31

"인민군대 처음 봤소? 무얼 그리 놀라오." - P35

"동무는 폐병 하나 못 고치는 조국이 밉지도 않소?"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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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케와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기분이 고약했다.
죄책감 같기도 하고 소외감 같기도 했다. 차라리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드러내게 될까 봐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래도 희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남아 있지만 우리 식구에겐 그게 없었다. - P19

앞날을 걱정하는 건 태평성대에나 할 짓이다. 전시에는 그날안 죽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걸 모르면 그걸 아는 자의 짐이 되기 십상이다. - P23

"오오라, 맞아.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 부기가 가라앉곤 했었는데 여태껏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얼마나 무식하고 못살았으면 침밖에 발라 줄 게 없었을까, 창피하고 지겨워만 했었지 그게약이란 생각은 꿈에도 안 했어." - P31

"이렇게 젊은 여성 동무를 만나서 기쁘오. 동무는 피난을 안갔소, 못 갔소?" - P35

그 겨울 내내 서울의 눈은 녹지 않았고 인민군대는 너나없이그렇게 홑이불을 들쓰고 다녔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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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와 다르지 않은 미래를 미래라고 할 수 없다. 미래는누군가의 꿈속에서 꾸어지는 것이다. - P44

형상이 있어야 신은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영감에 의지해서 자동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작가의 지난한 수고의 과정 속으로 영감이, 은총처럼 임한다. - P47

영감에 대한 미신에서 벗어날 것. 영감을 부정하지도 말고숭배하지도 말 것. 왜곡이나 악용은 더욱 삼갈 것. 모독하지말 것. 다만 필사적으로 ‘꿈꿀 것. 영감 같은 것은 있지 않다는 듯, 그러니 바라지 않는다는 듯 필사적으로 애쓰고 애쓰면서 기다릴 것. 기다리면서 초대할 것. 애씀이 초대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 것. 그조차 알지 말 것. 행여라도 영감이 자신의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은총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 P49

이 태어남은 다시 태어남이고, 종교적 용어로 ‘거듭남‘이다.
‘거듭나다‘라는 단어의 원뜻은 ‘위로부터 태어나다‘이다. 이 두번째 태어남은 그러니까 육이 아니라 영에 의한 태어남이다. 위대한 작가들이 불멸하는 비밀이 여기 있다. 그는 부모로부터 피와 살을 받은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 꿈꾸는 자의 꿈속에서 불의 신의 생기를 받아 ‘위로부터‘ 태어난 환영인 것이다. - P53

대상이 누구든, 혹은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없어지는 순간그리움이 사라진다. 교만은 그리움이 사라진 사람의 상태이다. 고향이든 사람이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더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 향수에 시달리지 않는다. 고향에돌아온 사람은 고향에 돌아가려는 열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향수가 해소된다. - P63

고향과 과거, 즉 경험된 것을 향한 그리움이 향수다. 향수는경험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 것이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럴 때 생긴다. 익숙한 것이 익숙하지 않아졌을 때 출현한다. 무지는 지知의 부재를 가리킨다.
이 부재는 획득 실패로 인한 것이 아니라 획득한 것의 상실로인해 생긴다. 알던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되었을 때 생긴다. - P69

다. 무지는 과거에 대한 것이고, 미지는 미래를 향한 것이다.
무지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미지는 추구를 북돋운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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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어요." 낸시는 아버지에게 그 말을 돌려주었다. "그냥 오는 대로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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