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책 표지는 노란색 아닌가요?"
이번에는 여자 쪽도 입이 벌어졌다.
"와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사장님은 말만 듣고 모든 걸 다 알아내는 셜록 홈스 같아요. 어떻게 그걸 아셨어요? 실은 제가 그 책에 대해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곤 표지가 노란색이라는 점 하나뿐이거든요."
남자의 말에 나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그리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그야 다 저만의 방법이 있지요.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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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통통해진 제철 슈파겔을 먹었다. 그리고학생들이 주먹으로 책상을 탕탕 두드리는 게르만식 박수를쳐준 종강 날 저녁, 마침내 삭아서 보드라워진 끝물 슈파겔을 먹었다 - P58

스물세 살의 나는 다른 건 몰랐고 두 가지만 알았다. 사법고시 준비만큼은 싫다는 것과, 그렇다고 사회운동가로 성장할 만한 그릇도 못 된다는 것. - P59

빗물에 구겨진 낡은주름치마 입고도 난 세상 저편 어딘가로 펄펄 날고 있었다

얼마 전 모르는 분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봉투를 열자 종이 석 장에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들이 보였다. 우연히내 글을 읽은 후 식탁보로 쓰라고 내어준 신문지를 매일 훑으며 다음 글을 기다렸다고, 한 달에 한 번꼴로 연재된다는걸 알게 되어 매달 선물 받는 기분이었다고, 그래서 참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편지는 교도소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 P69

이토록 한심하고 불완전함에도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어 전할 수 있다면, 그게 내가 지닌 쓸모 중 하나라면, 나는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글을 쓰고, 더욱 마음을 담아서 쓸 것이다. - P70

어떤 관계에서든 반말을 해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서로 존칭하면서도 얼마든지 거리를 좁힐 수있다. 문제는 내 경우 소신을 지키고자 ‘안‘ 놓는 게 아니라용기가 없어 ‘못‘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종의 교육 철학으로 경어를 고수하는 것이라면 일관성을 가져야 맞을진대, ‘-씨‘라는 존칭은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동연극풍의 말투가 되었다. "동환이는 어쩌다 발을 다쳤나요?"
"다음 단락은 은희가 읽어볼래요?" "준서 시험 공부 파이팅하세요!" - P72

대학원 첫 학기 때였다. 세미나를 마친 후 의기소침해하던내게 한 선배가 이야기해주었다. 굳이 70을 ‘말‘하려 애쓰지말고, 그 노력으로 80을 알기 위해 더 ‘공부‘하라고. "60 알면서 70인 척하기보다는 아는 건 80인데 70까지만 보여주는편이 낫지 않겠어? 그렇게 80, 90을 배워 알게 되면 언변은저절로 따라오는 거야." - P75

그렇게 나는 요긴한 기상 정보를 ‘네이버날씨 앱이 아닌 단골 도넛 가게에서 구했다. 고마움의 표시로 멀리서 사온 레몬케이크라도 잘라 갖다드리면 "빵 파는사람한테 빵 주네?"라며 웃었다. - P84

분노가 쉽사리 나의 힘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연민 없는 분노가 넘실거리고 예의 잃은 정의감이너무 자주 목도되는 지금 이곳에서 - P88

시선에 상처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손을 보태고 싶었다. 그게 더 옳아서가 아니라 단지내겐 그게 더 절실하게 여겨져서다. 그 과정에서 분노가 쉽사리 나의 힘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연민 없는 분노가 넘실거리고 예의 잃은 정의감이 너무 자주 목도되는 지금 이곳에서,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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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멀리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아플까내 목소리도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런 목소리가되는가그리고 그런 이름들은 무엇이었는가 - P103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모음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이것이 고독이다 - P107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얼어붙은 채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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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 ‘어린 시절 나에게 가족은…‘이라는문장의 뒤를 채워달라는 요청에 이지은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풀기 힘든 숙제를내주고 답을 알려주지 않은 얄미운 스승님."
그의 작품 세계 중간에 존재하는 커다란간극은 자립하려는 한 인간이 격렬히흔들렸던 시간의 증거다. 부수고 단단해지는일의 통증과 아름다움에 대해 이지은 작가와대화했다. - P182

《빨간 열매>에서 아기곰은 우연히 떨어진 빨간 열매 한 알을 먹고, ‘또 먹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 아주 높은 나무를 올라요.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삐끗해 추락하는 아기곰을 받아주는 너른품이 등장하지요. ‘나를 받아줄 누군가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라는 신뢰와 안정감이 작품에 낙관적이고 즐거운 기운을 불어넣어요. - P191

마시멜롱의 "가봐야겠어"와 노라의 "생각해볼 거예요" 는 같은결심을 딛고 있다. 경험 없이 믿어버리지 않고, 함부로 결론 내리지않으며, 사건의 여러 측면과 의미를 검토하고 판단하는 시간을스스로에게 선물하겠다는 결심. 유예할 줄 아는 힘. 주체적인 나로‘
서기 위한 중요한 퍼즐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다. - P201

막막한 탐색 과정을 버티는 비결을 묻는 나의질문에 유준재 작가는 ‘두려움‘과 ‘설렘‘이라는언뜻 상반된 두 단어를 꺼내 들었다. 그는 작업에임하는 태도에 대해 설명했지만, 나는 인생의난관을 마주하는 지혜를 건네받은 기분이었다. - P210

자아실현과 생계 사이에서 고민하는 직업인은 아주 많습니다. 어떻게 균형점을 찾으셨나요? - P213

저는 두려움과 설렘이 같은 단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한 교수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영감은 끊임없이 소리치고 두드리는 사람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단다."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으면 가질 수없어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면서 소통 가능한 이야기로 성숙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작업이 두려우면서도 조금은설레지요. - P220

희망은 아주 절망적인 곳에서 태어나는 새싹 같아요. 두려움의 극단에서 피어나는 설렘처럼요. 표현이 다소 진부해도 그게 진실 같아요. 《사기병》으로 알려진 사랑하는 후배 윤지회 작가가 천국으로 갔을 때, 그림책 모임 단톡방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어요. 지회가 병치레로 많이 힘들었으니 웃으면서 보내주자고, 울 사람은 장례식장에 오지 말라는 작은 농담과 함께.
허무나 절망을 선택하긴 쉬워요. ‘웃자‘고 말하는 건 어렵지요.
그런 힘을 갖고 싶어요.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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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하시군요. 사실 여학생이 제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군대에 다녀온 직후였습니다. 어느날 학교 과사무실에 제 앞으로 온 편지가 배달됐습니다. 여학생은 이제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2학년이 되었고, 그 편지는 아주 다정하면서도 진지한 내용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과외를 하던때 이미저에게서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여학생은 자기하고만나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게 불편하다면 다시 과외를 하는 것도 좋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편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여학생도 더는 제게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 P23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즘 다시 번역된 《롤리타》를 읽어봤는데 예전 그 느낌이 아니더라고요. 그때 읽었던 책이 줄 수 있는 감의 울림이란, 다른 책에서는 찾을 수 없나 봐요." - P24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이야, 그 정도로 붙어 다녔을 정도면 둘이 사귄다고 전교에 소문이 났겠는데요? 상대 여학생 처지에선 곤란한 일 아닌가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학교는 남녀공학도 아닌데요?" - P29

"책을 갖고 있으면 계속 생각이 날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마음까지 버리지는 않았어요. M이 떠나고 20년이 지났지만, 저는 그가 다시 올 걸 믿고 있어요. 그때까지는 아무래도 그 시집이 필요할 것 같더군요. 그런 소중한 책을 버리다니. 저는 계속 부끄러운행동만 했어요. 다시 M을 만난다면 부끄럽지 않은 사랑을 할 겁니다." - P31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난 다음 바닥이 꺼질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인즉, 드릴 말씀이라는 게 아주 황당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S씨는 교지에 보낼 독후감을 쓰려고 학교 도서관에 갔다. <그 여인의 고백>은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대로 고른 책이었다. 그는 운동을 즐기는 성격이고 소질도 있어서 학교 육상부에서 활동했다. 운동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에이스였다. 하지만 책은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학교 문학부에 있는 여학생을 보고 온몸이 뜨거워지도록 마음이 끌렸다. 놀랍게도 그게 바로 M씨였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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