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추스르려고 카페 사진들로 시선을 돌렸다. 여름의 느릅나무가 마치 코끼리 귀처럼 널찍한 잎을 역동적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삼우씨가 책자를 가져가라고 부탁했다. - P278

"유화 언니 소식도 아세요?"
"걔 영화기자 됐잖아. 이따금 별점 주는거 읽어보는데,
그때 성격 그대로더라. 무슨 블록버스터 영화에 ‘이럴 돈있으면 인류의 가난을 구해라‘라고 썼더라고." - P281

아주 오래된 우편 소인이 찍힌 그 엽서는 도쿄의시미즈 코하루(小春)라는 사람이 보낸 것이었고 받는사람은 기노시타 코주였다. - P283

"변해요, 만물이 다 변한다니까요. 멀쩡하게 지어놓은집도 무너지는 판에 사람 마음이야 시시때때로 변하죠." - P285

"당신은 마리코에게 보게 해서는 안 되는 장면을 보게만들었더군요." - P291

"아이고 그러다 목숨까지 빼앗기게요. 여자들 좋은 세상은 없는 거예요. 양반 가니 일본놈 오고 그게 가니 미국놈이랑 소련놈이 오고, 그다음에는 뭐가 올지 나는 이제궁금치도 않아요." - P293

"저희 집에도 조선인 네에야가 있었어요. 다정했죠."
여자가 마리코와 두자를 번갈아 보더니 아련한 추억에잠겨 말했다. 둘의 관계를 짐작하는 것 같았다. 두자가용무를 다 끝냈다는 듯 두루마기를 챙겼다. - P299

수리를 통해 보강되어가는 대온실처럼. 기억은 시간과 공간으로 완성하는 하나의 건축물이나 마찬가지였다. - P300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래?"
순신이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으므로 나도 다른 인사는 모두 생략하고 그렇게 답했다.
"네가 돌아왔다고." - P307

"기노시타!"
정원을 걸어나오는데 이창충이 그를 일본 이름으로 불렀다. 고드름이 맺힌 대온실 처마 밑에 선 이창충은 그 순간만은 옛날의 마사시처럼 보였다. 나는 부모와 다른 오니 아이, 도깨비다 하던 마사시처럼. - P311

"그럼 하느님이 칭찬하셔?"
"침묵하지,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 하는 거니까." - P318

"누구시죠?"
"나야 리사." - P333

"왜 그런 나쁜 생각만 해요? 오늘 청혼받은 사람도 있을 텐데."
"시체 되는 거랑 뭐 그리 다르지 않네요."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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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에 가까운 그 냄새로 흰 것은 가장희게 되고 깨끗한 것은 가장 깨끗하게 된다는 사실이잘 믿기지 않았다. - P173

나는 바짓단을 털어주며 말했다. 산아는 아주 어렵게세상에 나왔다. 팔개월 만에 미숙아로 태어난 것이다. 출산한 은혜를 보러 갔을 때 너무 작고 발갛던 산아가 떠올랐다. 그때 이미 남편과 시댁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던 은혜는 달이 안 찬 아기라고 안아보지도 않고 횡하니 병원을 나가던 남편을 욕할 의욕도 잃은 상황이었다. 그런 산아에게 바다처럼 큰마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고여 있는물웅덩이가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이 생생히 사는 마음이. - P181

"사람들은 어쩐지 자주 보는 건 결국 싫어해. 마음이 닳아버리나봐."
"건전지예요? 닳게?" - P180

영국의 하이드파크, 큐가든, 프랑스의 베르사유정원 등지를 돌며 거기 심긴 장미와 인도철쭉까지 소중히 기록했던 그이지만 미국에서는 센트럴파크의 나뭇잎 한장 기록하지 않았다. 마치 미국의 어떤것이 옮겨올까 저어하는 결벽주의자처럼 대부분의 여정을 기록에서 건너뛰었다. - P187

"내가 만약에 네 앞에서 단무지를 먹으면 헤어지자는신호인 줄 알어. 난 그만큼 그게 싫으니까." - P195

‘노력하지 않는 거지. 노력하면 왜 안 돼, 변명이지."
‘운 좋은 사람들은 꼭 그렇게 말하더라." - P201

"너 사과 잘하니?"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리사는 그렇게 말했다.
"가서 사과해. 미안해, 한마디면 된다더라." - P205

"당연히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요."
아랑씨는 내 질문에 가장 현명한 대답을 해주었다.
"어떤 경우든 공간이 사람과 연관되지 않을 리는 없으니까요." - P209

순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머리는 왜 자르고 나타났냐고 대체 왜 이러느냐고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고.
그때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해주지 못한 일을 나는 오랫동안 후회했다. - P222

150마리의 동물을 처리하는 데는 독살, 교살, 액살, 척살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결과적으로 해방이 될때까지 경성에 미군 폭격이 없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더한스러운 참상이었다. - P235

"왕주무관은 그냥 먹든가 개인카드를 쓰든가 하면 되지, 뭘 장급처럼 몸을 사려. 계속 승진해서 3, 4급까지 갈거야? 아니잖아. 요즘 세대들 공무원직에 오래 안 붙어 있거든." - P243

"한옥 대문에? 유리 손잡이를?" - P250

나는 그냥 웃어넘겼다. 산아는 왜 옛날이야기들은 이렇게 슬프게 끝나는지 모르겠다고, 역사책 읽을 때마다 해피엔드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너무 옳은 말이라서 또다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역사가 슬픈 건 죽은 이들 때문일수도 있고, 늘 미완으로 남는 소망 때문일 수도 있을 것같았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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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혹은 방송 관계 회사들을 방문하게 되면서출판사에 비해 얼마나 보안이 잘되어 있는지 놀랐다. - P45

책은 느린 매체이지만, 그럼에도 가장 첨예한 생각들을 담는다. 첨예함은 때로 폭력적인 이들의 주의를 끌고 만다. 상상하기 싫은 사람들이 상상하기 싫은 일들을저지르려 할 때, 더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방송계처럼 상시 보안 인력을 갖추는 것까지는 어렵더라도직원들과 관계자들의 안전을 위해 지금보다는 경계가필요할 것 같다. - P47

출판계의 많은 공적 자원이 심사를 통해 배분된다.
심사는 이렇게 이루어진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여전히 어떤 곳의 심사는 과정이 흐릿하고 편파적이기 그지없으며, 또 어떤 곳의 심사는 공정을 기하기 위해 언제나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뒤쳐진 곳과앞서 나가는 곳을 합치면 평균적으로 나아지고 있는 것같기는 하지만 편차 자체가 줄어들어야 할 일이다. 더나아질 수 있을 만한 방법들을 떠올려보았다. - P51

그럼에도 책을 사랑하고 책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늘 있어서 진입 경쟁률은 높은 편이다. 어렵게 진입하신 분들이 오래 일하면 좋겠지만, 꼭 그렇게 되지는않는 듯하다. "책을 멀리서 사랑할 때가 나았다"는 말을빈번히 듣게 되는데, 적은 임금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소회가 이어지곤 한다. 경제적인 면은 미리 감수하고 택했는데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구난방인 회사 내부와 비인격적 대우였다고 말이다. - P57

해외여행 중에 방문했던, 한 자리에서 백 년을 훌쩍넘긴 서점들이 부러웠다. 우리에게도 그런 공간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어느 지역을 떠올릴 때 곧바로 함께 부를 수 있는 서점의 이름들이 사라지지 않고 더해지기만을 바란다. 긴 마감을 끝냈으니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가서, 그곳의 공기를 품은 책을 사오고 싶다. - P62

마땅한 존중을 이야기할 때가 왔다. - P59

"요새 원고료가 얼마예요?"
"장당 만원쯤 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 P66

클릭 수가 돈이 되는 현실에서, 글의 제목을 결정하는 데스크 담당자 중에는 일부러 한껏 공격을 유도하는이도 섞여 있다. 본문의 내용과 거리가 먼 제목에 몇 번이나 해를 입었고, 역사가 있어 어느 정도 품격을 기대하는 매체에서도 그런 일을 겪다보면 신뢰가 무너진다. - P69

이상한 취향이지만 괴서들을 좀 좋아하는 편이다. 용두사미라고 요약할 수 없을 만큼 중구난방으로 전개되는책, 키메라처럼 얼기설기 엮은 책, 괴상하다 못해 우스워지는 그런 책들에도 매력이 있고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책이 언젠가 고전의 반열에 오를양서로 발간되었던 시대는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와글와글하고 부글부글하게 잡탕 냄비가 끓어야 탁월한 무엇도 그 틈에서 탄생하리라 믿는 편이다. - P75

고."
"그 책이 정말 나와버린 걸 믿을 수가 없다."
"그 출판사는 멀쩡한 곳인 줄 알았는데 그런 책을 내 - P76

출판인들이글을 더 많이 쓰면 좋겠다 - P82

출판인들이, 인접 영역의 텍스트 노동자들이 저작의영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면 좋겠다. ‘처음부터 작가였던 사람들만 진짜 작가‘라는 인식에는 아무래도 동의할 수가 없다. 텍스트를 사랑하며 다루는 사람들이 언제든 몸을 바꾸어 직접 생산도 할 수 있는 유연한 환경을그려본다. 8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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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보다 서울이 더 춥게 느껴졌던 나는 4월까지 코트를 입었고 옷자락에 묻은 기름자국도 그렇게 봄까지 학교생활을 함께했다. - P83

"아직도 코트 입고 다녀?"
잘생긴 이목구비 때문에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지만 나는 누군지 못 알아본 척을 했다. 금성무는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내 코트자락을 가리키면서 "아직도세탁 안 한 거야?" 하고 다시 말했다. - P85

누군가 놓친 유원지 풍선처럼 날아가버려도 그만일 테니까. 대문 밖만 나가면 아는 얼굴들이 나타나는 섬과, 사람물살을 헤치고 다닐 때마다 생소한 얼굴들이 차고 슬프게그를다가왔다 사라지는 이곳의 봄은 완전히 다른 계절이었다. - P87

"내가 괘럽와서 못 겐듸겠어요. 열몇살 어린 것 식집살이를 다 하고, 같이 늙어간 형님 봐서 참아왔어도 이제는전부 싫어요. 상황 되면 중국도 다시 갈 거고." - P93

"한참을 보고 있으니까 고기 살라고요? 하고 물어 내가 돈은 없어요. 했더니 영두 할머니가 어디 먼 데서 오셨시까? 하고 슥 묻더니 물고기 한 사라를 그냥 주더라고켜 먹어요. 하면서.. - P97

장사하러 나온 외할머니와 손님으로 만났다는 건 뭔가시시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수수께끼 하나는 푼 셈이니까나는 실망감을 감추며 그랬군요. 했다. - P97

리사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마음에 안 들어했다면 안나는 나의 이런저런 면들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그래서 마치 스프레이 방향제처럼 칭찬을 뿌려댔다. 내가 금방이라도 돌아설까봐 붙잡아놓고 싶은 것처럼. - P99

"사람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야. 네 말대로 그렇게 혼자라면 믿어야 살 수 있으셨겠지.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누군가를 믿기도 해." - P102

"백화점 과일이라고 하나 다른 거 없어. 한국 사람들은거뜻하면 사치를 부려서는." - P105

내가 답하자 리사는 복숭아씨를 벤치 아래로 뱉고는땅속으로 밟아 밀어넣었다. 그리고 창경궁은 밤에 봐야정말 사람이 살았던 곳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정말 사람이 사는 집처럼 적당히 비밀스러워진다고. - P113

"수준을 들키는 것보다는 낫지." - P113

‘포도를 너무 좋아해서 죽다니." - P118

"그래서 섬으로 왔구나. 지금 반에서는 괜찮니?"
"적어도 우린 벌집 아래 누군가를 세워놓진 않아." - P122

명령들이 만들어주는 영향력만큼 허망한 게 있을까.
그런 식의 만족감이란 겨울의 빈 새둥지처럼 허망하고 쓸쓸하지 않나. 사람들에게는, 진심을 주지 않음으로써 누•군가를 결국 무력화하는 힘이 있는데 어떤 부류들은 그런진실에는 무관심하곤 했다. - P128

벚꽃철이면 그 당시 경성 인구의 10분의 1인 2만 5천명의 입장객이 하루 만에도 들어와 북새통을 이루는 창경궁에서 가장 조용한 곳은 의외로 맹수사였다. 사람들이 붙어 휘파람을 불며 관심을 끌려 했지만 교토에서 들여온사자는 단 한번도 포효한 적이 없었으며 위장병을 앓았다. 백두산에서 사로잡아 온 호랑이도 있었지만 암컷 한마리뿐이었기에 그다지 용맹함을 드러낼 필요 없이 심심해했다. - P131

"어렵겠니?"
자신은 없었지만 거절할 도리는 없었다.
"아니요. 할게요, 할머니." - P141

"계속 사람이 살면 창덕궁 담 모양을 제대로 못 본다는거지. 야, 근데 궁만 보면 됐지, 바깥담까지 누가 보냐? 너창덕궁 담다 보고 싶어, 안 보고 싶어?" - P140

"나, 평생 들을 멋지다는 말 도희씨에게 다 들은 것 같아. 자존감 장난 아니게 높아진다."
"들을 만하십니다." - P147

. 가만히 침묵할 때 오히려 뭔가가 더 힘있고 따뜻하게 부풀어올랐다. - P156

"사랑한다고."
"뭐라고?" - P156

"구원이 뭔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가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까. - P157

순종이 창덕궁과 창경궁에 박물관과 식물원 그리고 동물원을 만드는 데 동조한 것도 교육을 위해서였다. 순종은 어찌 되었든 왕궁 문을 직접 열어 근대 문물 수용에 앞장서는 행동을 취했다. 유서 깊은 궁에 백성들의 흙발이들어서는 일은 참을 수 없다며 대신들이 들고일어나자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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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불운을 확인할 때마다 내가 가진 커다란 행운들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으니까. 나의 행운들을 생각하면 작은 불운에는 초연해질 수 있다. 예를들면 내가 다닌 여자고등학교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학교를 좋아하는 고등학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 P165

학교에는 또 아주 오래된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언제 늘어가도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종교와는 상관없이, 그냥혼자 있고 싶은 아이들은 가서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 P169

청소년기 특유의 샘솟는 열망은 누군가의 ‘팬‘이 되는데 쏟아부었다. 미국 가수를 좋아할 때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한국 가수를 좋아할 때는 수없이 많은 가사를썼다. 고등학교 때는 인기 있는 언니들하고 친해지고 싶어서 풍물패에 들어갔다. - P175

대기실에 박나은 배우가 등장하는 순간 내가 여태 했던다짐이나 기대는 다 잊었다. ‘와,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은 분위기가, 환한 빛이 느껴졌다. 저절로 존댓말이 나왔고, 차마 치근댈 수 없었고, 쑥스러워서 얼굴을마주 보기도 어려웠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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