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북서쪽 항구도시의ㅎ동. 언덕으로 이어지는 미로 같은 골목들 사이를 부두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이 휘감고 지나던 그 동네의 초입에는 내가 여섯 살까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았던 작은 집이 있었다. 그 집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당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좁은 땅에 심긴 벚나무다. - P9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를 뿐만 아니라 술도잘 마시던 나의 할머니 할머니는 1927년 황해도재령에서 태어났다. 여덟 남매 중 유일한 딸로 할머니가 태어났던 3월에는 입춘이 지난 게 무색하게 눈이 많이 내렸다. - P15
"그러고 보면 할머니는 옛날 사람치고 아이를적게 낳은 편이었네." 한번은 할머니와 함께 빨래를 개키면서 그렇게말한 적이 있었다. "애가 들어서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이냐." - P20
정해진 일상이 있는 사람들, 자신이어디로 가고 있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들을 반복해 만날 때마다 누구나 속해 있는 현재라는 국가의 불법체류자가 된 것 같은 과장된 감정에 사로잡혔다. - P23
가끔씩, 나는 지구상의 이토록 많은 사람 중 누구도 충분히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인 것은 아닌가하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우리가 타인을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 P26
나는 엄마가 사가지고 오는 그런 것들이 할머니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생각해왔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예의가 바르고친절하나 할머니가 더 이상 신 과일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 P41
강의 몸에서는 아몬드 냄새가 났다. 연애 초반부터 줄곧,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말하지 못하는 내밀한 이야기를 강에게 털어놓는 것은 대체로 열기가 채 식지 않고 어질러진 침대 위에서였다. - P47
언제나 똑같이 짧은 파마머리에 금색테의 안경. 조금은 피로하고 무뚝뚝한 표정. 엄마는 왜 꾸미질 않을까? 꾸미지 않아도 예쁘다는소리를 듣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걸까? - P55
할아버지는 어린 엄마를 동료 교사들 앞에 세워놓고 글씨를 읽게 시켰다. "영특한 아이네요!" 선생님들이 엄마를 보며 놀라운 듯 말했다. 유학을 가고 싶었으나 포기해야 했고, 사랑했던 여교사 대신 지적인 대화를 조금도 주고받을 수 없는여자와 하는 수 없이 평생을 살게 된 할아버지에게 엄마는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 P71
"그때 너희 아빠가 그러더라. ‘진짜 양식은 이런게 아니에요‘라고." - P76
그것은 내가 상황을 수습하고 화제를 돌리기위해서,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떠올린 질문이었을 뿐이다. 그 순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던엄마의 표정, 마치 정지된 것처럼 보이던, 진실을어떻게 감춰야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누군가의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던 사람의 표정을 나는결코 잊지 못한다. - P80
부두에 얽힌 기억 중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딱 한 번이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함께 부두에 갔던 일에 대해서다. 그부두를 다시 찾은 것은 할머니의 집을 정리하기위해 엄마와 함께 오랜만에 그 도시를 방문했던어느 토요일이다. 도로 사정이 안 좋을까봐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할머니가 살던 동네에 가까워지자 승객이 줄어들어 객차 안에는 엄마와 나, 그리고 몇몇의 외국인 노동자들만 세상의 끝에 버려진 유배자들처럼 덩그마니 남아 있던 기억이난다. - P86
복날에는 삼계탕을 나눠 먹고,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을 지어 먹고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함께 먹는 사이. "사람이살기 위해서는 좋은 날 같이 보낼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라고 할머니는 언젠가 내게 말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할머니를 살게 했던 사람들은나나 엄마가 아니라 아가다 할머니와 글로리아할머니였는지도 모르겠다. - P91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할머니가 나를보고 말하는 게 그저 좋아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할머니를 흉내 내어 손끝으로 할머니의 허벅지를 꾹꾹 눌렀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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