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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쓰다
매거진 t 편집부 엮음 / 씨네21북스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매일 왕국에 들어선다. 준비랄 건 단순해서 그저 드러 눕거나 기대어 앉거나 세상에서 가장 스스로를 편하고 늘어지게 만드는 자세를 취하고는 네모난 리모트 컨트롤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취향의 호오를 두고 간섭할 누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곳 거대하고 까탈스럽지 않은 왕국은 온전히 당신의 소유가 된다. 조금의 인내심만 있으면 그 왕국의 모든 문을 두드려 시시콜콜 잡다한 일상사에 타박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그저 귀찮고 내내 한가롭고 싶다면 편안히 그저 편안히 당신의 왕국 속 광대들의 익숙한 친절함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혼신을 다하는 그네들의 소용돌이에 풍덩하고 빠져 함께 웃고 울고 감정의 진창을 질척하니 즐기다 빠져나오고 싶으면 그저 스윽하고 일상으로의 컴백, 버튼을 다시 한 번 슬쩍 누르기만 하면 된다. 네모난 텔레비젼을 조정하는 네모난 리모트 컨트롤이 선사하는 저렴한 행복추구권은 단순한만큼 안전하고 안전한만큼 반복적이다.
드라마의 왕국, 그 높지 않은 문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익명의 시청자들은 단순하고 안전한 행복을 어느덧 포기하기 시작했다. 쌍방향 매체들의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공중파 방송의 시청자들은 어느덧 그 저렴한 매체를 취향의 분명한 표식으로 만드는 방법을 익히고 즐기기 시작했으니, 텔레비전이 일으킨 텔레지변이라 할 만한 일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하여 21세기 드라마 왕국의 로얄 패밀리는 그 선명했던 스타의 지형도와는 거리가 먼 지점에서 정체성을 발견하고 말았다. 적극적인 시청자들은 마치 김기덕의 영화와 홍상수의 영화를 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헤메이듯 그네들의 삶의 환부를 뜨겁게 위무하는 드라마 작가들의 진심어린 펜끝에 감격한채 그들만의 완벽한 소왕국을 튼실이 건설하고 있는 중이다. 흥행의 보증 수표라 할 수 있는 브라운관의 스타들이 cf화면을 감당해내는 십오초의 단발마 비명에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아차린 적극적인 브라운관의 우등 관람객들은 말초적인 쌩얼의 쾌감을 과감히 버린채 쌩이야기에 쌩삶에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기 드물고 심히 유쾌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 책, <드라마를 쓰다>는 마니아라는 계층을 거느린 변화하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 공중파 시청자들의 '스타'들에 관한 팬레터라고도 볼 수 있다. 황인뢰와 노희경, 인정옥과 신정구는 최근 몇년간 시청자들과 텔레비젼이라는 매체를 주의 깊게 보아온 문화향유계층에게는 전혀 낯선 이름이 아니다. 발칙하고 참신하게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그들의 족적은 단순히 드라마 작가에게서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라는 무시당하기 쉽상인 그릇에 오롯이 담아낸 향기가득한 삶의 편린들이 만들어낸 파장은 무척이나 컸다.
기억하기 어렵지 않다. 불붙은 네티즌 들의 안티놀이 속에서 오롯이 빛을 반짝이던 <궁>의 아름다움, 시청률이라는 링에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아대던 노희경의 자식들, 그 가족의 탄생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기억들, 복수와 전경, 중아와 시연의 이름만 떠올려도 아,하고 싸해지던 순간의 아픔들, 대략, 즐처드시던 뱀파이어 비둘기 포차의 짜릿한 쾌감을 떠올리고 미소짓기 그리워 하기란 감사하게도 무척이나 쉬운일이다. 이 책의 말미 신정구의 <안녕,프란체스카>에 대해 쓴 씨네 21의 김혜리 기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 책은 '동족'을 알아보는 표식같은 흔적이다. 그들의 속내에 공감하고 일상의 양분으로 성장한 드라마족들에게 이 책은 문집과도 같은 동족의 선물이다. 예민하게 그들의 작업을 들여다보고 감정이 듬뿍 실린 감상을 전하는 필자들의 문체는 팬으로서의 격앙된 흥분을 애써 감추고 담담히 우리가 놓쳤던 모서리의 또 다른 감격들을 단단하게 전달한다. 물론 작가의 인터뷰와 작품론이 주제가 되는 구성답게 전체적인 드라마의 흐름보다는 드라마의 작가가 만들어내는 작가세계에 집중한 글들이다.
드라마를 보는 아줌마, 드라마에 넋나간 된장녀라는 얄팍한 네이밍 속에 숨은 우리 사회의 진짜 조각들을 맛 보는 쾌감을 분명한 의도로 전달하고 있는 이 책은 텔레비젼 시대의 텔레비젼 세대에게 특히 이 책에 언급된 작가들의 쾌도난담,완소대화에 중독된 이들에게는 치료제임에 동시에 비아그라의 역할을 할 것이다. 책의 전체를 다듬은 백은하의 말답게 웹에서의 스크롤이 아닌 지면을 넘기는 책장의 맛까지 제대로 전달해낸 편집의 묘미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기억을 읽어낸 팬덤의 반듯한 열정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