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평점 :
"재미있기는 했어. 근데 너무 현실적이라서 좀,그렇더라"
웹의 클림트, 권신아의 몽환적이고 현실적인 표지의 이 책을 먼저 읽은 스물 여섯, 사직한지 두 달이 되어가는 동생이 내게 넘겨주며 한 말이다.
"오빠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섹스 앤 더 시티>같은 거 좋아하잖아?"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달콤한,이라는 형용사가 사만다나 캐리따위의 여성 캐릭터를 빗댄 말일까 하는 기대를 갖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30여분동안 맨헌트에서 건진 것 같은 캘빈 클라인 팬티의 모델과 섹스를 하고 다음 날 브런치를 즐기는 경제력과 성욕이 비현실적인 조합을 갖고 있는 사만다나 프라다매장에서 남자 친구와 관계가 깊어 지기를 당연히 기대하는 샤넬 맹세녀 캐리는 그저 뉴요커일 뿐이었고 그녀 서른 둘의 오은수는 맨하탄을 도버 해협과 비슷하게 느끼는 이 땅 서울의 서른 둘이었다.
너무,현실적이어서 좀 그렇다기 보다는 좀 그렇게 비현실적인 얘기를 기대했던 나에게 이 책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책을 휙하니 던져버리고 집중할만큼 현실,감이 있었다. 스물 일곱의 남성인 내가 <섹스 앤 더 시티>를 좋아했던 것은 그 여인네들의 판타지 보다는 통찰력에 있었다. 부에 대한 허영이라기 보다는 취향에 대한 허영이 너무 그럴싸했고 아프고 곡절많은 인생을 마놀로 블라닉의 구두굽을 킥킹해버리는 시퀀스들은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녀들은 직업인인 동시에 자신의 '퍽커블'함을 양분삼아 그 도시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의 성인,도시 여성들이었다. 스물 일곱이라는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나는 그녀들의 또각또각 힐소리가 사랑니를 뽑아버리는 것처럼 경쾌하게 들렸고 어쩌면 삶이 드라마같다는 생각보다 삶을 드라마처럼 만들어가는 근사한 여성에 대한 별 볼일 없는 남성의 판타지를 오묘하게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여성 시청자들이 그러했겠지만 나 역시 마지막 시즌의 마지막 장면의 그 로맨틱함에 치를 떠는 동시에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오은수가 우거지 국물을 마시던 장면에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조금 슬펐을 뿐이다.
사실이 그렇다. 모든 현실은 그렇게 조금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약간 슬플 뿐이다.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영역이 어떤 부분까지를 포함하는 장르일까를 살짝 고민했지만 결국 이 책은 나의 서가 목록에 현실적인 여성 소설이라는 장르에 넣기로 했다. 나의 여동생이 공감했던 대로 '오전 내내 방 안에서 뒹굴다가 7시전에 남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화장이나 해대는 '은 그저 인터넷에서 끌어 당긴 문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른 두 살 그저 평범해서 길거리에 묻혀도 아니 혹은 길거리에서 끄집어내 뒷조사라도 벌려도 펑謀?오은수와 그녀의 눈에 한심하게 살기로 작정한 것 같은 친구들인 재인과 유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남자,아이,직장이 없는 서른 두 살, 서울의 여성들에 관한 생태 보고서가 아닐까 싶다. 문장들은 대체로 겉멋이 든 것처럼 보이지만 단단하고 날카롭다. 비유들은 군더더기가 없이 상황과 감정 묘사에 충실해서 태오라는 순정 만화 주인공 같은 7살 연하의 남성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보는 장면에서도 로맨틱한 향기의 인위적 도용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여주인공들이 섹스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 섹스의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데 익숙하다면 만취는 아니었지만 알콜의 기운을 빌린 섹스에서 오은수가 느끼는 것은 이른 아침 연하의 남자가 배웅해주는 택시 안에서의 시선의 의식 그리고 쾌락에의 부끄럼움이다. 대개 평범하다고 인정하는 것과 정말 평범한 것 사이에는 어떤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현대 도시 사회에서의 취향의 차이는 개별적 조건들보다 더 크게 기능하기도 하는데 오은수의 연애에서는 그 비중이 정확하게 균형을 잡는다. 현실적이게 말이다. 연하의 달콤한 애인과 달콤하지 않지만 미더운 사내 사이에서 그녀가 느끼는 방황은 휘핑 크림을 듬뿍얹은 라떼와 텁텁하지만 개운한 아메리카노 중에서 단 한가지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게 절망적이다. 결국 그녀의 오더는 성공적으로 주문되지 못했고 일견 연애담으로만 짜내려간 듯한 플롯은 현실속으로 발을 내딛는 상황들을 설명할뿐이었다는 진실을 책장을 덮고서야 알 수가 있었다.
나이가 스물이든 서른이든 아니면 오십이 넘어서든 누구나 달콤한 연애의 환상을 가지고 살아간다. 꽃미남으로 둘러싸인 찜질방에서 낮잠을 자는 을녀나 혹은 나이트에서 돈많고 가벼운 게다가 아름다운 여성과의 부킹을 기대하는 갑남들에게나 그 환상은 냉혹하게도 현실 속에서 존재한다. 어떤 꿈에서 깨오나오는 과정에 우리는 그 순간을 달콤하게 기억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진짜처럼 느껴져서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읽을때마다 뜨끔했던 것 인생의 원나잇 스탠드가 아니라는 차가운 태도 때문이다.그렇게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비어버린 통장 잔고처럼 달콤하게만 기억되는 치열했던 연애가 얼마나 영양가 있을까하는 답답한 자문이 단지 몇몇에게만 그치는 잠언은 아닐꺼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