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답지 않게 한참씩 생각을 다듬고 말을 골라가며 들려준남자의 모습은 상세하면서도 동시에 모호했다. - P329

트럭에 올라탈 때 안나는 애써 경선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안나에게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곧 다시만날 사람들의 작별인사였다. - P333

변두리에 날림으로 지어진 집이지만 방 두 개짜리 셋집으로이사한 건 그 덕분이었다. 이사온 첫날밤 좌식 책상이 놓인 작은방에 자신의 이불을 깔며 잠깐이나마 안나는 긴 여행이 끝나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 P341

정의로운 소년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를 더러운 곳에서구할 용기는 있었다. 하지만 더럽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그 소녀를 계속해서 좋아할 용기는 없었다. 부패한 시스템이 - P352

밤의 도시 너머 먼 불빛을 바라보며 안나는 생각했다. ‘첫‘
은 ‘가장 오래된‘이다. 안나와 경선의 ‘첫‘은 점점 ‘가장 오래된‘으로 수렴해간다. 경선의 말처럼 그 모든 게 다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은 매 순간이 ‘첫‘이다. 안나와 경선에게도 첫 순간은 수없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경선이 틀렸다. ‘우리의 첫‘에 대한 기억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
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 - P357

한 사람의 몸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들어 있다. 몸은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고 사랑의 꿈과 왜곡을간직한 도서관, 마지막 삶이 거처할 최후의 집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재로 사라진다. 개체의 시간을 끝내고 무한에 섞여드는 여정이다. - P375

할말이 있어서 소설을 쓴다.
그런데 쓰다보면, 그게 뭐였지? 하고 불안해지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렇다면 생각을 더 해야지.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네. 그러니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 P378

-우리는 하나의 삶을 여러 번 반복하며 사는 건지도 모른다. 현재가 최근이지만 가장 오래된 날이듯이. 언젠가의 나에게는 첫 순간이 되듯이. 우리 모두 그 언젠가의 시간 속 얼굴이웃을 때에 가장 예쁜 얼굴이 되기를 바란다.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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