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본 뒤 그곳에서 맥주를 한잔 마시는 게 수민의 원래계획이었다. 긴 오르막길을 걸어야 했던데다가 출구 공사중인 지하보도에서 헤매는 바람에 시간이 두 배쯤 더 걸렸지만, 괜찮았다. 여행이란 다 그런 거니까. 그러나 방파제의 높이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 P10
"프랑스어가 그냥 들으면 부산말이랑 완전 똑같거든." 급할 때면 한 번씩 튀어나오던 사투리. 선배의 부산식프랑스어 단어와 단어가 조악하게 연결된 몇 가지 문장유형의 돌려막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리스닝에 취약한수민은 반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 P14
노래방으로 옮기고 자리가 한층 더 불편해진 수민이 일어날 기회를 엿보느라 주변을 훑어볼 때였다. 희고 마른 팔하나가 수민 앞으로 쑥 뻗어나와 노래방 리모컨을 가져갔다. 술 대신 싸구려 오랑지나를 축내던 남자애였다. - P17
수목원에 도착하자 수찬은 꽃이 모두 진 수련 연못 앞으로 수민을 데려갔다. 메마른 꽃대만이 구부러진 철사처럼군데군데 남아 폐허처럼 보이는 얕고 더러운 물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 P25
진지함. 평소 늘 그에게 바랐던 진지함을, 수민은 결별을 통보받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 - P32
인터뷰의 마무리로 원장은 ‘피아노 조율사는정년이 없고 시간 운용이 자유로워 재취업을 고민하는 주부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 P37
그날을 떠올리던 수민은 문득 생각했다. 틀린 걸 고치는게 자신의 일이라면, 그게 피아노라면 어떨까 하고. 그러니까 만질 수 있는 것을 손으로 만져서 고치는 기분은 어떤걸까, 하고. - P38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만 보고 있으면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울림은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잘 들리는 법입니다." - P41
"뒤돌아봐" 뒤를 돌자 그곳에 커다란 느티나무와 강이 있었다. - P45
그런 그가 은근한 기대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눈이 올것 같다고 말했을 때, 수민은 단단한 쌀알이 물과 열기를머금고 부드럽게 부풀어오르듯 가슴 한구석이 울렁이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기쁨이나 설렘과는 다른, 기대감도 그리움도 아닌 무언가였다. - P50
"조율 배우니까 좋은 점이 뭐야?" 곰곰이 생각한 수민이 대답했다. "만져볼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손으로 만지작거리다보면무엇이든 고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가 생겨요." - P55
수민은 반복되는 좌절을 통해 삶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기대를 저버리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기대감은 탁월한 적응력을 지닌 자생식물처럼 가슴 한편에서 끈질기게 싹을 틔웠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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