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넉 달 전부터, M이 사는 이 건물의 407호에서 살고있었다. - P69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작은 방에서 혼자 앓는 사람에게 필요한 근사한 꿈에 대해서 한숨 자고 일어나면 잠들기 전의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꿈이 있다면 어떤 꿈이어야 하는지, 소년은 407호앞에 도착해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P71

대치역에 도착한 후에는 8번 출구로 나가 영어 학원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했다. 다행히지갑엔 우유 값에 해당하는 현금이 남아 있었다. 다른 여덟개의 카드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소년은 카드 대신 남은 현금을 모두 꺼냈다. 오늘 하루만큼은 무사하고 싶었고 그 어떤거짓된 언어로도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았다. - P87

영혼을 잃은 육체는 조금씩 습기를 잃어 가며 버석거렸어. 악취도 났던가. 그랬겠지만 자각하지 못했어. 나쁜꿈도 꾸지 않았어. 그저 진짜 혼자가 되었다는 기분이 모래를삼켰을 때처럼 자주 입안에서 깔깔하게 씹혔을 뿐이야. - P100

그때는, 그 모든 것이 진짜 인생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 P108

미수가 세상에 나올 때도 이런 막이 있었다. 무사히 이막을 뚫고 지나가면 신미수란 이름은 서류에서도, 사람들의 기억과 거짓된 언어와 어리석은 술수에서도 더 이상 마모될 일없이 그저 조용히 삭제될 수 있을 것이다. 손을 뻗어 그 투명한 막을 여러 번 더듬어 보았지만 미수의 몸이 빠져나갈 만한 틈은 없었다. - P127

다행히 남자는 메모지만 내려다볼 뿐, 소년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소년은 인사도 없이 다급하게 돌아서서유리 회전문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유리 회전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소년이 걸어가야 하는 길들이 다시 생성됐다. 마지막으로 언뜻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남자는 그제야 소년을 찾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 P131

자정 무렵, 윤이 문득 지하로 내려가 보자고 제안했고 미수는 주저 없이 윤을 따라나섰다. 아무도 없는 새벽의 텅 빈쇼핑몰을 구경하는 건 흔히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비워둔 탓에 한 줌의 온기도 남지 않았을, 친구였고 위로였으며 때로는 시간이 차단된 캡슐 같기도 했던708호로 혼자 돌아갈 자신도 없었다. - P140

윤이 먼저 뛰던 것을 멈추고는 허리를 접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땅바닥으로 내려온 미수도 윤 곁에 서서 윤과함께 호흡하며 여전히 놓지 않고 있는 두 손을 내려다봤다.
고마워. 미수는 윤과 눈을 맞추지 못한 채 속삭였다. - P145

"현수야"
부르는 그 말에, 소년은 대답했다.
"응, 누나." - P163

한 권의 책을 이루는 건 종이 뭉치가 아니라 그 책을 쓰는동안 바쳐진 책상의 시간일 것이다.
마음을 다해, 이제 내가 온몸으로 지나온 그 시간을 전한다. - P165

소년에게 누나는 엄마이기도 했던 셈이다. 기원은 분화되지 않은 것이다. 기원 속에는 엄마의 품과 연인의 향기와 누나의 냄새가 한 덩어리인 채로, 하나의 전체를 이룬 채로 3함되어 있다. 그 때문에 현수가 누나를 부르는 이니셜 M은 그에게 유일하게 평안과 휴식을 주는 천국의 엠블럼이다. 이니셜 M은 미수의 M이자, 마더(mother)의 M이기도 하다. 이 기원을 품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숲의 비의이다. 엄마가 소년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소년이 엄마(곧 누나)를 돌보는 역할극이 가능해진 것은 이 때문이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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