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 유자는 자주 암벽 공원을 찾았다. 동네에 그런 곳이 있었다. 넓은 공원 한 곳에 세워진 높은 암벽에 예쁜 색깔의 조약돌들이 색색이 박혀 있었다. 사람들이 그 돌을 손으로 잡고 발로 짚으며 올라가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몇 달 가까이 그 동네에 살면서 그즈음에는 거의 매일 공원을 산책했음에도 암벽은 늘 아무방해 없이, 아무 매달림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 멈춰 서서고개를 쳐들어 꼭대기를 바라보는 사람도 대체로는 그녀뿐이었다.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안전요원 부재시 등반을 금지한다는.
아마도 특정한 날에만 운영하는 시설인 것 같았다. 그녀가 그곳을 산책하는 시간은 그 특정한 때의 밖이거나, 아니면 그녀의 시간이야말로 특정했는지도. - P119

그러니까 그렇게 소박하고 희미한 저항. 낯간지럽고 귀여운 의지...... 그렇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귀엽다고 생각하는순간이 있었다. 얼마나 징그러운 사람이면, 아직도. - P121

‘잘라버릴까‘라는 말은 포스터의 빈 공간에 둥둥 뜬 것처럼 쓰여 있었다. 은율이 펜으로 직접 쓴 것이었다. 그 손글씨에 형광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또 이런 메모가 덧붙어 있었다. - P123

고작 그런 불빛이 은혜롭고 성스럽게 보였다. 아이를 뱃속에품고 있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난데없는 공포와 견딜 수 없는 서러움, 그런가 하면 또 난데없이 들려 올라가는 듯한 성스러움. - P125

내 몸으로 내 새끼를 낳는 일이 어떻게 징그러울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게 왜 길 한복판인가. 구급차 안과 길 한복판은 달라도너무 달랐다. 그렇게 따지면 병원도 길 한복판이 아닌가. 지구라는 구체 위에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 설령 그곳이 바다 한가운데거나 깊은 산속이더라도 당신이 흔적을 남기는 순간, 그곳은당신의 길 한복판이 아닌가. - P127

잔뜩 준비를 하고 나가도 다 쏟아붓기는커녕 잠깐 미워하기도 전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그는 은율을 집으로 보낼 때마다 버스 창밖에서 손을 흔들었다고 했다. 나의 상처야, 안녕, 해맑은 웃음을 감추지도 못하며, 그래도 너무 해맑게 보이는 건 아닐까 잠깐씩 망설여가며. - P133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가제라고 되어 있던 전시회의 제목이었다. 시안과는 달랐으나 그렇다고 많이 달라지지는 않은 포스터가다시 은율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완성본임을 안 건 그 포스터에는 아무 낙서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뭘 잘라냈는지, 그것도 싹둑 잘라내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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