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열심히 살 필요는 없다고 가르친 건 부모님이다. 요만한 위장을 달고 나왔으면서 미련하게 그걸 모르네. 저러다 짜구나지. 옆집 개를 두고 엄마와 아빠가 사이좋게 흉보는 동안 일곱 살의 나는 납작한 배를 남몰래 손바닥으로 눌러보았다. 허튼데 힘 빼지 말고 생긴 대로 대충 행복하게 살다 가면 된다는것. 그것이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의 보편적인 세계관이었다. - P301
김밥집에서 마주친 동창에 대해서는 그냥 놔두는 쪽을 택했다.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진 며칠 후 문자메시지가 왔다. 시조카가 돌핀에 입학하려고 하는데 혹시 어떻게 안 될지 묻는 내용이었다. 그건 내 권한 밖의 일이라고 구구절절 답장을쓰다가 천천히 지웠다.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 P307
나중에 들어보니, 우재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나에게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기세가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차가운 맥주를 마시러 가자는 제안은 내가 먼저 했다. - P313
‘보답‘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그 자리에 넣을 생각을 했을까. 이 아이는 천재인지도 몰랐다. 머리 가죽이 벗겨질 듯한 압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소정원이 제시한 금액은 한 회당 십만원이었다. - P319
우재는 아까에 비해 꽤 이성을 찾은 상태였다. 다행이었다. 어떤 관계는 매듭 없이 끝난다. 그가 좀더 걷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숲이 보이는 건널목 앞에서 헤어졌다. - P333
. 「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음으로써 전략적으로 순결을 사수하던 영악한 언니는 이제 자취를감췄다. - P343
이번 정이현의 소설집은 그 선 너머의 자리를 모색하는장이다.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기에 그곳은 말 그대로 ‘노피플 존‘이지만 그 공백은 가능성의 다른 얼굴이다. 이 소설집이 담담한 결기로 뻗어간 그 선 너머의 자리를 당신도 함께 응시해주길. - P364
하나의 긴 실을 상상하곤 합니다. 어떤 구간은 직선으로 어떤 구간은 구겨진 채로 또 어떤 구간은 잔뜩 엉킨 채로 존재하지요. 저는 엉킨 부분 앞에서 영원히 끙끙대거나 깔끔하게 끊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굴복하는 대신, 그 매듭 아닌 매듭을그냥 놔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생을 이어간다는 말의 무서움을 실감하는 중입니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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