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한 번씩인데 뭘 그렇게 빡빡하게 해요. 부원장인 윤성이 농담조로 말했다. 옛날에 땡땡이 안 쳤어요? 글쎄, 나는그냥 원칙대로 하는 게 좋아요. 한 번씩 봐주기 시작하면 다들봐달라고 할 텐데. 소진의 대답에 윤성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윤성과 함께 학원 문을 잠그고 나왔다. - P229

아무리 생각을 돌려봐도 어깻죽지가 서늘한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걸 소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한여름이었다. - P234

내 얘기는 안 한 거야? 그의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소진은 당혹스러웠다. 급히 시선을 돌린 것은 본능적으로 그의 눈빛 속에 어린 감정들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왜 내 눈을 피하니, 라고 기욱이 중얼거렸다. 평소와다른, 엄격한 말투였다. - P236

소진과 연락이 되지 않자 그는 매일 강의실 앞에 찾아왔다.
사범대 일층 복도에서 수십여 명의 학생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그가 무릎을 꿇었을 때, 소진은 지금 기욱이 스스로를 비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241

졸업 즈음에 이상한 문자메시지를 한 번 받았다. 나쁜 년.
발신번호는 0이었다. 이동통신사를 찾아가면 발신자 전화번호를 알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소진은 그러지 않았다. 당시소진이 바란 것은 오직 한 가지, 완벽한 단절뿐이었다. 소진은전화번호를 바꾸었다. - P243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자신도 곧 알게 될 것만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기이한 예감이었다. - P246

소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보험회사의 담당자였다. 소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그 놀라운 가속도와 그것이 남긴 흔적에 대하여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 P254

재연은 마우스를 움직여 같은 글에 적혀 있는 그 문장을 복사했다.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새 창에 붙여 넣으면서 저 글쓴이도 어디선가 가져온 문장이리라 추측했다. 사람들이 원하는바는 다 비슷비슷할 테니까.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성실한 분‘과 ‘모십니다‘ 사이에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실 분‘이라는 문장을 넣었다. 한참 있다가 ‘진심으로‘를 지웠다. 물을 한잔 마시고 와서 방금 전 추가한 부분을 다 지웠다.
대신 ‘따뜻한 분‘이라고 써 넣었다. 그러자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글도, 마음도. 휴대폰 번호를 적어넣고 게시 버튼을 눌렀다. - P274

에이에스요?
살아보시고 맘에 안 들면 다른 이모로 바꿔드린다고요.
사람을 바꿔드린다는 말을 재연은 한동안 생각했다. - P278

사내아이가 혼자였단 말임다. 엄마 아버지가 노상 바빠서내가 데리고 잠도 자고 목간도 다 시키고 그저 다 키웠는데. - P281

-사모님 재가 마음에 안드시나요? 한번 기회를 주시면 재가 사랑으로 잘 돌볼께요. 잘 돌볼 수 있슴미다. - P283

이제 거기도 변해서 농사지을 사람이 없슴다.
재연은 장소장이 처음에 보낸 메시지를 다시 찾아보았다.
-김남이, 육십 세, 흑룡강성, 유치원 교사 출신. - P288

재연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낯빛이 하얗게 질린, 저 바보같은 남편이 부디 이 음습한 계획의 공범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만약 끝내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래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 P294

‘왜 자꾸‘ 다음의 말은 정확히 듣지 못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재연은 그 빈칸에 대해 상상했다. 왜 자꾸말썽일까. 왜 자꾸 지랄일까. 왜 자꾸 엉망일까. 왜 자꾸 슬픔일까. 왜 자꾸 여기일까. 왜 자꾸 자꾸, 자꾸 입 밖으로 발음해보았다. 자꾸 자꾸 은서가 재연을 따라 했다. 재연은 집으로 꺾어지는 모퉁이를 지나쳤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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