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의 등장인물도 극영화의 배우들처럼 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의 건축 스케줄에 대해서나는 결정권이 없다. 그들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 사이를 중재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할까. 이야기를 만든다는 게 가능하긴 할까. - P55
나는 왜 정기용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는지를 다시자문했다. 나는 정기용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정기용이 죽기를 바란 것은아니다. 촬영하는 내내 정기용의 건강을 염려했고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일이 그에게 즐거움이 되기를 바랐다. - P61
누가 이야기와 플롯의 차이를 묻는다면 나는 이 책에서 읽은 부분을 말하곤 했다. 소 설가 E.M. 포스터가 소설의 이해란 책에서 설명한 이야기와 플롯의 차이를 책에서 다시 인용한 부분이다. "왕이 죽고 나서 왕비도 죽었다. 두 가지 사건에 대한 간단한 해설, 이것은 줄거리다. 그러나 첫째 장면(왕의 죽음)과 둘째 장면(왕비)을 연결 짓고, 한 행동을 다른 행동의 결과로 만들면플롯이 된다. 왕이 죽자 슬픔에 못 이겨 왕비도 죽었다." - P65
찬란한 하얀 성이라 믿었던 논픽션의 문턱에서 암초를 만났지만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의 메인 사건은 마치 극영화의 캐스팅을 기다리는 과정처럼 지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67
쓰고 고치고 다시 쓰며 플롯은 단단히 구축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영화에 있어서의 플롯은 촬영이라는 물리적 과정을 동반하고 비용을 발생시키는 안타까운 잉여노동의 생산물이다. 생산물인데 부산물인 셈이다. - P69
이 영화를 본 이후부터 나는 빨리 서사를 구축해야겠다는 망상에서 자유로워졌다. 더 이상 억지로 사건을 만들고 플롯을 구성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이야기는 억지로 이야기를 쥐어 짜내서 만든 이야기다. - P75
당분간은 편하고 자유롭게 정기용의 옆에서 그의 일과 그의말을 지켜보기로 하자.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다는 자책을하지 말자. 오늘 하루도 영화를 만들었다고 치자. - P75
땅속에 잠들고 있는 흙을 일깨워 지표면 위에 벽을 세우고공간을 만들며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위대한 일이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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