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남자의 집에 초대되었다.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머뭇대지 않고 출발했다. 부르면 찾아가는 게 내 일이었다. 지금 내가 이어둡고 낯선 거리에 서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고. 이정표가 알려주기로, 이 거리의 이름은 만경로란다. - P9
나는 이미 거기 서 있었다. 남의 집 대문을 막 밀고 들어갈 작정은아니었다. 주인을 부르기 전에 마당을 좀 넘겨다볼까 싶었을 뿐. 대문이 낮아 까치발을 들 필요가 없었다. 회양목 울타리 역시 대문만큼이나 낮았다. 그저 눈만 뜨고 있어도 집 전체가 중심 시야로 쏙 안겨 왔다. - P11
내 동생 공달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바보가 됐다.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종일 창밖만 본다. 아버지와 헤어질 때 ‘아빠, 안녕‘이라는 말을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한다.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주고 싶다. 당신이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라고 들었다. 일을 맡아줄 수있겠는가. - P16
형, 나 곧 돌아올게. 찾지 말고 기다려줘. - P37
연락할 누군가가 있다면 그게 더 놀랄 일이었다. - P41
팍팍한 시절이었으나, 불운을 견디는 우리 형제의 능력만큼은 비약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우리는 질식사하지 않도록 숨 쉴 구멍을몇 개 뚫어놓았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잠든 후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본다든가,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면서 치킨을 시켜 먹는다든가. - P43
전화가 끊겼다. 나는 벽시계를 봤다. 9시 1분. 내 시선은 거실 바닥을 정처 없이 흘러 다녔다. 온갖 쓰레기 위로 지난 석 달간 나의 반려곤충이었던 바퀴벌레들이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평화롭던 머릿속이심란하게 헝클어졌다. - P47
훈수꾼은 고민하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살다 보면 불판을 갈아야 할때가 있는 법이야.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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