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너네 고모는? 소박맞았잖아." - P155

수를 만난 곳은 동대문역 근처에 있는 중식당이었다. - P156

"그게 왜 떠보는 거야."
"떠보려는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완전히아니라고 할 수 있어?" - P157

나는 소주와 맥주를 일대일 비율로 섞는 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황금비율은 내가 알려줬다. 소주잔 기준으로 소주한 잔, 맥주 한 잔을 따라 섞으면 기가 막히게 양주 맛이 났다.
무슨 양주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당히 독하고 적당히 단맛이 나는 양주 맛. 그러니까, 소맥은 소주의 맛과 맥주의 맛을적당히 조합해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했다. 뭐든지 적당히 웃기는 말이지만 어디에도 들어맞는 말. - P158

그리고 아까워서 어떡해, 예쁜 무릎, 아까워,
하며 심지어 털까지 난 내 무릎을 너무도 소중하게 여겨주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고모의 금융 관련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 P159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영성체를 받을 수 없어. 나는 순정의 단호한 목소리에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순정은 그런 구석이 있었다. 어린이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 절제된 위압감 - P161

"야, 단데기도 단단해지느라 바빠."
"네가 단데기를 어떻게 알고."
"몰라도 알겠다." - P165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수가 나서서 그 둘을 깨웠다면나는 짜증을 부렸을 확률이 높다. 수가 늘 그런 식으로 자기삶을 정당화하려 든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삶은 기괴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는 도무지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 P167

"응. 그래서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켠 채로 그 노래를 한 곡다 부르면, 실제 그 노래의 주인공이 거울에 등장한대." - P172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 P172

"성혜 어릴 때는 어땠어요?"
고모는 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걔는 지 엄마만 끔찍이 아껴." - P175

나는 울기 시작했다. 순정은 그런 질문을 나른한 목소리로끊임없이 해댔고 내가 울면 그제야 질문을 멈추었다. 그다음팔로 내 얼굴을 감싸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고모가 만약 아프면. 아프면? 꼭 보살펴줘.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우리는 잠에 빠져들 준비를 했다. - P177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난 후 나는 순정만큼은 아니지만, 소량의 항우울제를 처방받아 먹고 있다. 중소기업의 적은 월급에 비해 나가는 돈이 너무 많고 삶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내 집은 없는데 남의 집이 너무 비싸서, 손 안 대고 돈버는 사람들이 있어서, 애인이 미워서, 다양한 방식으로 마음이 헐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식탁 앞에서 짐짓 심각한 얼굴로말했다. 정신병도 유전이야. 유전. - P179

"싫은데 왜 만나?"
"싫은 게 아니야."
"귀찮았잖아. 괜찮아. 나도 귀찮았어, 평생."
"외로워하시는 것 같아서 그랬어."
"네가 평생 그 외로움을 책임질 수는 없잖아."
"평생 외로움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 그 사람을 보살필수 있니?" - P181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고모나 엄마가 그저 나에게 끔찍한사랑을 흠뻑 물려주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도 그사랑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과 결함이 나를 어떻게 구성했는지도. - P183

"한동안은 문제가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간헐적으로 가로막힌 곳에 돌진을 하는 거야. 나도 처음엔 정말 놀랐어. 자길가로막는 걸 모조리 다 부수겠다는 기세로 몇 번이나 그렇게갖다 박더라." - P185

고모는 자주 물건을 부수기도 했고 아버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암이 재발하고 나서 고모는 빠르게 힘을 잃어갔다. 비쩍 말랐고 입냄새가심하게 났다. 병원에 입원한 후로는 오롯이 누워만 있었다. 모든 힘을 소진한 사람처럼. 임종을 앞두고 고모는 숨 쉬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도 나도 아닌 엄마를 아주 오랫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간신히 신음처럼 말을 뱉었다. 민애야. 그런 다음 눈을 감았다. 우리 중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 순간 우리가족이 가진 축축하고 퀴퀴한 기억들이 전부 엉켜버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도요.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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