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최초의 회화였다고 플리니우스는 말했다. ‘최초‘
라는 말을 꼬투리 잡자면 사실은 아니다. 아니지만 믿어볼까, 기원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 사랑이 기원을 창조한다는것. 거기에서부터 하늘이 펼쳐지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밀려온다고. 거기에서부터 쓸쓸한 봉우리가 일어서고 설운호수가 고인다고. - P9

‘침묵은 없다‘는 말 대신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침묵은소리들이 모여 사는 집이다. 소리들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 P13

나는 그의 앞으로 가서 묻는다. 마지막에 들은 곡명이 뭔가요. 라크리모사 Lacrimosa. 그가 답하며 손으로 칠판을 가리킨다. 거기 적힌 글자를 대강 훑고 나는 돌아선다. 동시에 등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덧붙여진다. 8번 트랙이에요.
내가 다시 뒤돌았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듯 어렴풋한 미소만 짓고 있다. - P27

그리고 음악 선생도 세상을 등졌다. 멀리 건네오는 소문으로, 정사라고 했다. - P28

끝은 정말 끝일까. 끝은 사람들의 운명을 스쳐 어딘가로계속 가고 있는 게 아닐까. 노래에 업혀서 죽음 비슷한 잠에업혀서. 도무지 끝을 모르는 끝은, 끝없음을 향해서. - P31

강 속의 연인 가운데 한 사람만 본다실패는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하면서 - P36

십칠 년을 굳세게 산 나의 고양이가 아무데 주저앉아 오줌 눈 것을 훔칠 때마다 사르트르의 변명을 떠올린다이것은 사르트르의 오줌이다슬픔에 지린내가 있는 줄 알게 된다 - P48

그렇게 이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다사다난했지. 여러번 목줄이 풀려 집을 나가기도 했고, 병이 깊어 수술을 하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통곡을 했고. - P59

내가 잃은 것은 후각만이 아니다. 나는 기억을 잃었다. 기억은 그토록 후각에 빚지고 있었다. - P63

사순이는 여느 야생의 사자가 그러하듯이 나무 그늘로들어갔을 것이다. 달릴 줄 몰라 천천히 걸어들어갔을 것이다. 철창까지는 겨우 20, 30미터이니까, 집이 지척이니까,
마음이 편안했을 것이다. 잠시 꾸벅꾸벅 꿈을 꾸다가 다시스스로 철창 안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것이다 것이다 것이다. 죽지 않았다면. - P75

그런 일은 대개 저지대에서 속절없이 일어난다. 슬픔은단연코 저지대로 모여드는 것이다. - P79

새벽마다 꿈같은 것을 뒤축에 넣고 나섰다가어김없이 발을 절며 돌아왔다 - P82

늙어가는데 주름이 져야지요. 없애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기쁘게 슬프게 살았다는 증거이고, 눈빛이고, 어떤비밀이고, 파도인데요.
파도가 없다면 나는. - P96

바깥에 남은 공이 밤으로 변하기를 기다린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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