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강아지나 고양이 중 한 마리만 키워야 한다면 어느 쪽이야?" "둘 다 별로, 난 동물 안 좋아하잖아." 마트의 반려동물용품 코너 앞을 지나며 선주가 물었을 때 정현은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에 선주는 입을 떡 벌리고 정현을돌아보았다. 어떻게 인간 된 자로서 개나 고양이를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바라보는 듯했지만 곧 답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물었다. - P67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보아야 할 그 무엇이었다. 빚 역시 앞으로 수년간은 정현의 옆자리를떠나지 않고서 머무를 것이고, 정현이 죽었나 살았나 그 누구보다도계속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빚이야말로 정현의 반려였다. "나는 그런 거 없어. 그리고 난 연어 안 좋아해" - P70
"너 지금 속으로 개편 들었지?" 정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너야말로 진짜 미친년이야. 정신 좀 차려. 걘 결혼도 해서 잘 산다며." - P73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안 될까?" "얼마나 더? 하도 오래돼서 요샌 빚이 내 반려자 같고 그래." 정현의 말에 서일은 정색을 했다. "넌 진짜 뭘 아껴본 적이 없구나. 어떻게 반려자랑 빚을 비교해? 그건 반려라는 단어한테 모욕이야." - P77
정현에겐 그 말이 꽤 달콤하게 들렸다. 오랜만에 다시 맞잡은 서일의 손도 너무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토록 변변찮은 자신을 믿는다는서일의 말을, 정현도 믿고 싶었다. 돌고 돌아 마침내 귀의해야 할 종교를 만난 것처럼 정현은 다시 서일을 믿었다. 그 사실이 감격스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선주가 서일의 머리채를 잡지만 않았다면 정현은 서일이 다시 자신의 집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전셋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다. - P84
"그래, 번호 하나만 골라줘." "나머지 다섯 개는 다 골라놨어요?" "응. 하나만 더 있으면 돼." "반줄 거예요?" "뭐?"" "당첨되면 반 줄 거냐고요." "그래, 줄게."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그리고 번호 하나만 골랐는데 왜 반이나줘요?" 서일의 번호를 가진 초등학생은 정현보다 더 야무진 데가 있었다. "그렇지...... 네 말이 다 맞다." - P87
반려빚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코트 깃을 세우고 현관에 서서 정현과 작별 인사를 했다. 반려빚은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정현을 떠났다. 정현 역시 현관에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찬장에서 소금을 꺼내 와 현관밖에 팍팍 뿌렸고 문이 닫히자마자 걸쇠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다시는 얼씬도 못 하도록. 꿈속에서 정현은 마냥 홀가분했고 깨어서도 그랬다. 마침내 0이 된 기분. 정현은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이상하게 무섭기만 해서 그저 0인 채로 오래 있고 싶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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