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전탑에 둥지 튼 천연기념물 황새가족‘ - P178
며칠 뒤 선배는 또 물었다. 총은 여기서 준비할 수 있다는데? 웬 총? 사냥을 하려면 총이 있어야지. 웬 사냥?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우리는 도둑처럼 슬그머니 꽃이라는 의미의 체체크를 빠져나왔다. 하늘은거의 머리 위까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가 일찌감치 서두른 것은 날씨가 심상치 않다는 운전사 아저씨의 조언 덕분이기도 했다.
"서면 못 간다. 눈이 순식간에 쌓인다. 세우면 다 같이 죽는다." 아저씨의 말은 비장하게 아름다웠다. 세우면 죽는다니. 그것도 다 같이. 그것도 눈에 갇혀서. 아저씨는 리얼로 말했을 테지만 우리는 그걸 낭만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누군가, "죽어도 좋은데…"
취한 정신으로 열어젖힌 커튼 너머, 눈은 지겹게도, 아득하게도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 날이 뭐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영원히 잊을 것 같지 않은 그런 날이 있었다. 내가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눈송이거나 그 설원을 백마 타고 내달리는 칭기즈칸인 것 같던 그런 날이.
"몽골에 왔으면 몽골 법을 따라야지!" 당연히 양고기구이였고, 나는 입에도 대지 못했다.
‘1992년 10월 31일’그건 유통기한이었다. 그때가 2003년, 그러니까 유통기한으로부터 무려 11년이 지난 거였다. 후배가 내 귀에 속삭였다.
"나 술 안 좋아해." "예전에 많이 마시지 않았어?" 선배와 같이 술 마시러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선배의 그 말간 웃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진다. 무엇을 버려야 할지는 선배만 알고 있겠지, 통조림에는 유통기한이 있지만 관계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선배와 알고 지낸 지 근 30년 만에 나는 이제야 선배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 같다. 세월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영 아닌 것 같다가 좋아지는, 그런 관계도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위스키가 그러하듯이.
"S. 이건 유기농이 아닐 수도 있고, 유기농이라 쳐도 스티커는 떼야 하지 않을까?" S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뉴요커들은 그냥 먹던데?" "네가 스티커 떼는 걸 못 봤겠지!"
누가, 혹은 무엇이 나를 술꾼으로 만들었을까? 3박 4일 마시는 즐거움을 알려준 김사인 선생? 아니면 술을 들이켜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었던 나름 쓰디쓴 인생? 아니, 나를 술꾼으로 만든 건 사람이다.
"아니. 술이든 담배든 마약이든, 내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그 무엇도 하지 않을 거야. 평생!" 이런 젠장. 그렇게 호기롭게 뱉어놓고는 마약 빼고 다 하고 있네. 내가 나를 배신하는 것, 그게인생이지 뭐.
몇 년씩 술을 마시지 않았던 때도 있다. 수배 중이었을 때, 아이 낳고 몇 년. 술을 마시지 않은 시기에 나는 진짜 홀로 있었고, 그때의 나는 뼛속까지 외로웠다. 마흔 넘어서야 깨달았다. 나를 키운건 술이 아니라 외로움이었다는 걸.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마신다. 사람이 좋아서다. 술이 몇 잔 들어가면 나도 다른 이들도 솔직해진다. 위선과 가식의 껍데기를 벗고 온전한 나로 누군가와 만나는것, 나에게는 그것이 술이다.
6내가 술꾼이 아니었다면 이 책 또한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술이 있어 누군가의 내밀한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이 책에 등장한 대부분의 사람은 아직도 내 곁에 있다. 이 책이 그들에게 혹여 실례가 되지 않으면 좋겠다.
이 책을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과 나의 블루와 요즘 나의 벗이 된 참이슬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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