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반내골은 아주 좁다. 산과산사이, 평평한 땅이 많지 않아 집도 산비탈에 층층이 들어서 있다. 논도 몇 마지기 없는 산골 마을은 여름에도 해가 짧아 수확량조차 많지않았다. 한 선배가 아버지 돌아가고 난 뒤 나를 반내골에데려다주고는 숙연하게 물었다. - P97

명절을 앞두고 큰집이 북적거리기 시작하면 나는 괜스레 뒤란을 어슬렁거리며 그들이 나를 알아봐주길, 오라고손짓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 P99

"양반집 장손으로 귀하게 커서 그랬겄제. 아부지 땜시울 어매만 직싸게 고생을 했제. 그 고생을 워찌 다 말로 허겄냐." - P104

내 평생 그렇게 힘든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 P108

"까짓것, 한천권, 올칼라로 뽑아준다캐라." - P113

"형. 우리 오늘 황제 못지않은 하루를 보내지 않았어?
우리도 황제의 술을 마실 자격은 있는 것 같은데?"
은사님이 환히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일행은그날 밤 행복하게 만취했다. 무색무취의 보드카에서 인간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지난밤의 술이 쓰디썼던 것은보드카여서가 아니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 민족의 상처, 아직도 그 상처에 짓눌린 고려인들, 무엇보다, 날로 발전한 대한민국에서 고려인의 아픔 따위 상관없이 두발 뻗고 살아온 우리 자신의 무관심과 무능력이 술맛을 쓰디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 P114

"언니! 블루 두 병 값이야. 언니는 그 돈을 쓰는데 나는왜 안 돼?"
"어머어머 얘 계산법 좀 봐 정말 미친년 맞구나. 술은 마시면 없어지지만 이건 남잖니! 그리고 난 너보다 부자잖아!" - P118

Y 작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언니는 블루가 화폐 단위냐?"
나는 해맑게 소리쳤다.
"응!" - P122

"회장님이 주시는 대로만 마셔야 됩니까?" - P128

(이래서 나의 지인들이 나를 가난한 공주라 욕하는 모양이다). - P129

"정 작가는 나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소."
설마 그럴 리가 내 평생 가장 좋은 음식과 술을 사준 은인인데, 아니라고요! 평생, 죽는 날까지 보고 싶다고요! 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영원히회장님을 볼 수 없었다. 뭐 딱히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십여 년 지나고 나니나의 대응이 참 미숙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 신라호텔로 오라고 할 때 못 간다고 딱 자를 게 아니었다. 이렇게말했어야 한다. - P131

그러나 최선을 다해도 가난에서 쉬 벗어날 수 없는 가난한나라의 가난한 노동자는 그 선의에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다. - P135

나는 실패한 사회주의자인아버지의 삶이 늘 애달프고 서글펐다. 아버지 스스로 당신의 삶을 쓸쓸해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맥켈란 1926을 마시며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결말이 내 취향에 더걸맞다는 것을. 아버지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리라는 것을 참으로 다행 아닌가? 성공할 기회가 없어 타락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은! - P138

원래 소심한데다 돈 못 벌어 더 소심해진 남편의 심리를 A는 무려 A4 두 장에 걸쳐 묘사했다. 참으로 섬세한 심리소설이었다. - P143

쇼핑을 싫어한다! 어떤 친구와도 쇼핑을 가본 적이 없고,
어떤 친구와도 미주알고주알 연애 이야기나 결혼생활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 P146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눈은 쉴 새 없이 내려 정강이가잠길 정도로 쌓여 있었다. 검정 비닐봉지를 든 채 A는 눈밭을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A가 뛸 때마다 비닐봉지 안에 든 초록색 대파가 덩달아 들썩거렸다. 촌스럽기도 하고청승맞기도 하고 천진하기도 하여, 나는 A를 보며 배꼽 잡고 웃었다. 여자든 남자든, 그날의 A와 다시 한번 소주잔을부딪치고 싶다. - P149

그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면 볼일 보는 나의 실루엣이 보일 터였다. 빨갱이의딸은 똥조차도 은밀하게 쌀 수 없구나, 사춘기의 나는 똥을 싸며 자조하곤 했다. - P155

#SA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 손에는 어김없이 조니워커 블루라벨이 한 병씩 들려 있다(벌이가 넉넉하지 않은 제자들은 블루대신 시바스리갈 12년산, 이게 우리 집 룰이다). - P159

"응! 언니는, 존나 빠른 달팽이야!"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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